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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피정 1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20호 입력 2026/02/26 10:36 수정 2026/02/26 10:41

침묵 피정 1

 

                                                   신달자

 

영하 20도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까지는

소리가 없다

바람은 아예 성대를 잘랐다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

단호히 얼어 무겁다

들수록 좁아지는 길도

더 단단히 고체가 되어

입 다물다

천 년 넘은 수도원 같다

나는 오대산 국립공원 팻말 앞에

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걸었다

한 걸음에 벗고

두 걸음에 다시 벗을 때

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

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무슨 저리도 지독한 맹세를 하는지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

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있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

손 얹을 때가 되었다

날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

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고

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

경배드리고 싶다.



피정, 대지의 침묵이 내 속에서 깊어지는 시간



손진은 시인확대
손진은 시인
어저께 설날이 지났으니, 또 한 해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부대끼며 너무 많은 말을 하며 살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때 우리는 굳이 신자가 아니더라도 침묵 피정을 다녀올 일이다.

 

시인은 영하 20도의 추위 속 “오대산 입구에서 월정사”에 이르는 길을 걸으며, 사물이 입을 닿는 모습을 보며 깨닫는다. “바람”이 “아예 성대를 잘”라내고, “계곡 옆 억새들 꼿꼿이 선 채/단호히 얼어 무겁”고, “좁아지는 길도” 고체로 화하는 이 자연이야말로 침묵으로 가득찬 “천 년 넘은 수도원”이 아니고 무엇인가?

 

더욱 “산도 물도 계곡도 절간도/꽝꽝 열 손가락 깍지를 끼고” 결의를 품고 있는 것이다. 걸을수록 시인은 서서히 그 모습에 동화된다. “나도 이젠 저런 섬뜩한 고립에/손 얹을 때가 되었다”고 깨달을 즈음, 그 고립은 더 고립이 아니다. 시인의 영혼은 상승의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날이 저물고 “오대산의 고요가/섬광처럼 번뜩이며 깊어지”는 황홀한 체험을 하는 것이다. 그 깊이는 나의 깊이와 연결된다. 오대산이 내 안으로 걸어 들어온 것이다.

 

입이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의 욕망과 죄업을 내려놓는 일이다. 말을 내려놓고(“말과 소리를 벗어놓고”), 내 육체와 영혼의 내부가 통로를 여는 순간. 눈은 더욱 반짝이고(“드디어 자신보다 큰 결의 하나/시선 주는 쪽으로 스며 섞인다”) 귀와 정신은 더 커지고 너그러워지면서, 어느새 마음은 수천의 사람들이 편하게 놀 수 있는 광장이 되는 것(“깊을수록 스르르 안이 넓다”)이다.

 

새해에는 침묵에 “경배드리고 싶”은 나날이 더욱 많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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