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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시로 만나다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5호 입력 2026/01/15 14:11 수정 2026/04/22 12:04


대각국사 문집. <사진=국립중앙도서관>확대
대각국사 문집. <사진=국립중앙도서관>

 

원효가 이 땅에 왔다간지 1400여 년이 지났지만 그에 대한 철학적, 학문적 연구는 물론 문학 작품으로 이어지며 재탄생, 재해석되고 있다. 신라와 고려,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원효를 대상으로 한 시를 중심으로 시대순으로 요약하여 살펴본다.


당나라의 혜원(慧苑)(673~743 추정)


원효를 두고 중국에서는 해동(海東)이라 칭했다. 당나라의 혜원(慧苑)은 원효의 저서 『금강삼매경』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이 찬탄했다.


해동(海東)이라고 칭하고 그 이름을 적지 아니한다. 몸은 동이(東夷)에 있어도 그 덕은 당나라를 덮었으니,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할 만하다.
雜華諸師 古著疏抄 引證曉言 稱海東曰 不擧其名 身在東夷 德被唐土可謂不世出之偉人矣
(참고문헌 : 『원효연구』)


송나라의 연수(延壽)


선교일치(禪敎一致)의『종경록』100권을 저술한 영명 연수는 원효를 높이 평가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원효대사는 그 지혜가 해와 달에 해당하고, 그 식견이 인천(人天)을 꿰뚫어, 크나큰 정법(正法)을 모두 얻고, 진여(眞如)의 깊은 곳을 모두 통합하였으니, 스님은 과연 대오대철(大悟大徹)한 분이다.
(참고문헌:『종경록』)


북송의 각법(1071~1128)


90여 명 고승들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선어록(禪語錄) 300여 편 수록한 『임간록』을 저술한 혜홍 각범도 원효에 대한 찬사의 글을 빼놓지 않았다.


밤 무덤 속 해골물은 물로선 으뜸이요,
손님 술잔 속 활 그림자는 결국 뱀이 아니었네.
개중에는 나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미소지으며 남기신 책을 들어 몇 글자 적어보노라.

夜塚髑髏元是水 客盃弓影竟非蛇 箇中無地容生滅 笑把遺編篆縷斜 (참고문헌:『임간록』)


신라의 견등(見登)


견등은 통일신라 9세기 중엽 활동했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지만, 원효와 의상의 불법 모두 상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를 두고 불세출의 위인, 해와 달, 나르는 용과 같은 표현으로 원효를 높이 평가했다.


원효법사는 나르는 용과도 같이 가르침의 비를 신라에 뿌렸기 때문에 구룡(丘龍)이라 이름하며, 대주 법장화상은 코끼리를 타는 덕으로 당나라에 깃발을 나부꼈기에 향상(香象)이라 이름한다.
(참고문헌: 『대승기신론동이략집』)



대각국사 의천 (1055~1101)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은 중국 유학, 속장경 간행, 천태종 창시 등 크나큰 업적을 남긴 분이다. 원효를 숭배하여 직접 분황사를 찾아와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이란 제문을 지어 올렸다. 『대각국사문집』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원효가 동방의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시호가 없음을 안타까이 여겨 형인 숙종에게 청하여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고려 숙종 6년(1101년)의 일이었고 의천이 입적하던 해였다. 700여 년 뒤 이곳을 찾은 추사 김정희는 절 근처에서 비석 일부를 찾아내어 ‘차신라화쟁국사지비적(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라는 글귀를 비부에 새겨두었다.

 

동문선(출처 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확대
동문선. <사진=한국민족문화백과사전>

김부식 (1075~1151)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 또한 원효를 빼놓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유학자이지만, 개인 사찰을 소유할 만큼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근기 설법과 화엄과 원융의 내용으로 원효를 칭송하는 시가 『동문선』에 전해지고 있다.


恢恢一道 落洛其音
분명한 하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건만
機聞自異 大小淺深.
근기에 따라 서로 다르게 들으니
크고 작고 깊고 옅은 이해의 차이가 있네.
如三舟月 如萬竅風
같은 달이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과 같고
바람이 구멍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 것과 같네.
至人大鑒 卽異而同
지인(至人)의 큰 이해로 보면 다르면서 또한 같도다.
瑜伽名相 方廣圓融
유식은 명상을 이야기하고
화엄은 원융을 이야기하지만
自我觀之 無往不通
내가 보기에는 서로 통하지 않음이 없네.
百川共海 萬像一天
백 개의 강이 모두 같은 바다로 가고
하나의 하늘이 만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네.
廣矣大矣 莫得名焉
크고도 넓어서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뿐이다



임춘(林椿) (1148~1186)


금강산과 관동지역을 여행하며 쓴 임춘의 『동행기(東行記)』는 한국 기행문의 효시로 일컫는다. 낙산사를 찾아와서 원효와 의상을 생각하며 각기 시를 지었다. 다음은 원효에 관한 시다.

曾聞居士老維摩
일찍이 들었노라 거사인 늙은 불제자는
飛錫凌空萬里過
지팡이를 휘날리며 허공을 건너서 만 리 길을 지나가네
已潰文殊來問疾
벌써 문수보살을 보내어 문병하러 왔으니
不應無事出毘耶
일없이 비야리(인도의 지명)로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원효를 이야기하며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을 인용하고 있다. 불교계에서는 유명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대화가 전해지고 있다. 임춘의 불교에 대한 내공도 만만찮음을 알 수 있다.

 

이인로의 파한집(출처 서울대학교).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확대
이인로의 파한집. <사진=서울대학교>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화집이다. 『파한집』에는 원효가 불교 포교를 위해 만든 걸림이 없는 춤이라는 뜻의 무애무(無㝵舞)를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復若秋 배는 가을 매미 같고
頸如夏鼈 목은 여름 자라 같네
其曲可以從人
그 굽은 것은 남을 따르려 한 것이고
其虛可以容物
그 비어 있는 것은 만물을 품을만 하네


호로병의 배는 가을철 매미와 같고 목은 여름철 자라와 같다는 말이다. 이인로는 무신정권하에 문인으로서의 상실과 고독감에서 자유로운 원효를 등장시켰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출처 서울대학교).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확대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사진=서울대학교>

 


백운거사 이규보 (1168~1241)


일생 동안 팔천 수의 시를 지었다는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 『백운소설』 등을 남긴 고려를 대표하는 문장가이다. 스스로 백운거사로 칭한 것에서 보듯, 이규보는 원효와 관련된 사찰을 여행하며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아래 시는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원효에 관한 시다.


剃而髠則元曉大師 髮而巾則少性居士
雖現身千百 如指掌耳 此兩段作形 但一場戱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고,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
나타나는 모습이 수천, 수백 가지라도
손바닥에 손가락 대기만큼 간단할 뿐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 이규보의『동문선』 제50권 「소성거사 찬」


일연스님(1206~1289)


최근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의 속명이 전견명(全見明)으로 밝혀진 바 있다. 『삼국유사』가 없었다면 한국사는 속이 빈 강정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일연스님은 원효에 대해 ‘성사(聖師)’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 만큼 원효대사를 존경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원효불기(元曉不羈)」 편에서 원효의 출생 장면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설화와 비슷하게 묘사할 만큼 원효를 숭모했다. 그리고 특별하게 원효에 대한 시를 남겼다.


角乘初開三昧軸
각승으로 처음 삼매축을 열었고
舞壺終掛萬街風
춤추는 호롱박 마침내 온 거리에 유행했네.
月月明瑤石春眠去
달 밝은 요석궁 봄의 꿈은 지나가고
門掩芬皇顧影空
문 닫힌 분황사 돌아보는 그림자가 공하다.


1연에서 각승은 소의 두 뿔 사이에서 저술한 《금강삼매경론》을 삼매축으로 표현했다. 2연에서는 저잣거리로 들어간 소성거사를, 3연에서는 요석과의 만남을 봄날의 꿈으로, 4연에서 마침내 공(空)의 세계를 표현하며 원효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설잠 김시습(1435~1493)


1462년에서 1465년 사이 어느 해, 경주 남산 용장사에 머물던 김시습이 원효의 자취 가득한 분황사를 찾아와서 『무쟁비(無諍碑)』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남겼다. 무쟁이란 화쟁과 다른 말이 아니다.


그대는 알아보지 못하는가!
신라의 신이한 승려 첫 아침(元旭)을,
삭발하고 신라의 저자거리에서 도(道)를 행하였네.
입당하여 진리를 공부하려다 돌이켜 고향으로 돌아와
출가와 재가 구분 없이 마을 곳곳을 유행하였네.
거리의 아이와 부인들에까지 뜻을 쉽게 얻으니
누가 누구집 아이인지 다 가리킬 정도였네.
그리고 또한 밀행은 크고 항상됨이 없어서
소타고 법을 연설해 종지를 해석했네.
여러 경의 소초들 책궤에 가득하니
후인들 그를 보고 다투어 따랐네.
국사로 추봉하니 그 이름 다툼없음(無諍)이라.
저 비석에 아로새겨 매우 칭송하였네.
비석 위의 금가루는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법다움 그림과 좋은 찬사 또한 기쁘기 그지없네.
우리 역시 잘 변하는 무리여서
환어에 대하여도 대강은 알았다네.
다만 내 옛것을 좋아해 뒷짐지고 읽건만


원효를 생각하는 설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유자와 불자 사이를 오간 그의 심사가 평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감이 교차하고 회한의 감정이 차올랐을 것이다. 율곡 이이를 비롯한 유학자들은 심유적불(心儒迹佛)이라 하였으나, 오히려 반대인 심불적유(心佛迹儒)였으리라 여겨진다. 최소한 원효가 머물렀던 분황사에서 만큼은 그러했을 것이다.


서정주와 고은을 비롯한 근현대의 시인들


근·현대의 대가들도 어김없이 원효를 작품 속으로 모셔 왔다. 서정주 시인은「원효가 겪은 일 중의 한 가지」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작품 속에 원효를 등장시켰다. 승려 생활하다 환속한 고은 시인도 분황사를 배경으로 설총의 빗자루질을 소재로 「경전의 뜰」이란 시를 남겼다.


어느 날 원효사마께 아들 설총이 왔다. 가을 분황사 금당(金堂)의 뜰 그 넓이를 비를 내다 쓸게 하였다. 한동안 아들은 뜰을 쓸고 아뢰었다. 가을 소소로로(昭昭露露)한 손가락질의 원효아비는 새로 뜰을 쓸라 하였다. 한동안 아들은 넓은 뜰을 새로 쓸고 아뢰었다. 그러자 원효아비, 정결한 마음으로 뜰을 돌아본 다음, 한 쌍의 은행나무 그루를 넉넉하게 뒤흔들었다. 아들이 쓴 뜰에 잎새들이 쌓인다. 이렇게 가을 뜰은 쓸어야 하느니라고, 원효사마는 총(聰)을 처음으로 사랑하였다.

원효와 설총 부자간의 사랑을 노래했다. 가을날 넓은 분황사 뜰을 쓰는 설총의 빗자루질과 또 한 번의 빗자루질, 그 사이의 세계를 노래했다. 그 사이가 깨침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외에도 김수영 시인이 말년에 쓴 「원효대사 - 텔레비전을 보면서」, 황동규 시인의 「오어사에서 원효를 만나다」, 그리고 동국대 고영섭 교수는 불교학 강의와 원효학을 연구하면서 원효에 대한 연작시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은 시인들이 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원효는 우리들에게 지대한 삶의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사상가, 철학가이기도 하지만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가수, 사회운동가, 혁명가 그리고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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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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