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 외조부 김덕민에게 글을 배웠고, 동주(東洲) 이민구(李民求)·화담 서경덕의 제자 습정(習靜) 민순(閔純,1519~1591)에게 수학하였다. 광해군 즉위 이후 북인의 입장에서 1617년(광해군9) 2월 25일 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좌천되어 경주부윤(재임1617.04~1619.02)으로 내려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선조 8년에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고, 다시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고, 북인이 대북과 소북으로 갈리는 파행의 정치시대였다.
계축옥사는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의 정인홍, 이이첨 등이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역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을 축출한 사건으로 윤효전이 공신으로 오르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이이첨 등에게 미움을 산다.
경주부를 다스리며 향촌 질서를 안정시키고, 농정·조세 문제를 바로잡으며 전란 이후 경주부 행정기반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1617년 10월 14일에 아들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가 경주부 관아에서 태어났고, 한강 정구를 관아에서 영접해 편의를 제공하며 아들의 두괴(斗魁) 아명을 받은 뜻깊은 시기였다. 사후에 한강 정구와 다산(茶山) 목대흠(睦大欽,1575~1638) 등이 윤효전의 만사를 지었다. 경주에서 태어난 윤휴에게는 6살 많은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고, 1619년 2월에 부친 윤효전이 임지에서 사망하자 모친과 서울로 돌아와 여주 등을 오가며 살았다.
유학사에서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두 사람은 주자학적 견해가 달라 예송논쟁이 일어났는데, 효종 사후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로 1차 기해예송(1659), 효종비 사후에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로 2차 갑인예송(1674) 정치적 대립갈등으로 번진다. 특히 윤휴는 『중용』·『상서』ㆍ『주례』ㆍ『예기』ㆍ『춘추』 등 여러 경서에 대해서 독자적 해석과 이해를 가하고 분장(分章)ㆍ분구(分句)를 하며 독창적이면서도 문제적 사상의 접근을 하였고, 이에 노론 지식인 및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거론하였다.
『광해군일기』에 “윤효전은 겉으로는 유자(儒者)같이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음모와 술수가 있는 자였다.” 그리고 이이첨에게 붙었다가는 다시 배반하는 처신에 대해 부정적 평가하였다. 송시열이 민정중에게 보낸 편지에 “처음에는 북인 기자헌(奇自獻,1562~1624)과 유영경(柳永慶,1550~1608)에게 붙었다가 유영경이 패하자 또 반대파 유희분(柳希奮)에게 붙어서 큰 옥사를 일으켜 폐주[광해군]의 뜻을 맞추었고, 박승종(朴承宗,1552~1623)이 국혼(國婚)으로 인하여 재기하자 또한 오래된 교분으로 단단히 결합하였고, 또 이이첨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는 마침내 몸을 기울여 따라붙었다. 계축년 이후로는 유희분ㆍ박승종과 등지고 폐모론(廢母論)을 극력 주장하여 정조(鄭造)ㆍ윤인(尹認)과 다름이 없었다. 뒤에는 또 속으로 두려워지자 이이첨의 뜻을 약간 거슬러서 이이첨의 배척을 받아 경주부윤으로 쫓겨나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아들 윤휴 역시 평생을 강학으로 명분을 삼다가 거절을 당하고, 서인에 붙었다가 버림을 받고, 남인에 붙었다가 밀려났으며, 지금은 또 소북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에는 종실 복창군 정(楨)과 복선군 난(枏)을 갖고 처신으로 삼고, 당색에 구애받지 않는 입장에 대해서 두 부자가 몸을 의탁하는 처세를 언급하였다. 또한 『숙종실록』에도 윤휴를 “선비의 이름을 핑계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출세시키는 바탕으로 삼는 자”그리고 강한 황경원의 「明陪臣傳」에는 송준길을 평가하면서 간신 윤효전과 적신 윤휴로 기록하였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이들 부자를 혹평하는 사례가 많으나 훗날 1908년에 겨우 신원되었고, 유학사 입장에서 조금씩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경주부윤 윤효전과 경주태생의 윤휴에 대해서 지역의 인물과 연관성을 깊이 있게 연구해 위상을 재정립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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