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만한 지나침
기형도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書記)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존재성의 깊이에 대한 때늦은 심감
시는 두 가지 서사로 구성된다. 첫째 이야기는 과거에 화자인 ‘나’가 눈이 퍼붓는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관공서, 유리창 너머, “한 사내를 본” 사건이다. 눈이 퍼부어 건물들이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뭉치로 변해”가는 거리. “춥고 큰 방에서” 혼자 울고 있는 서기(書記)와, 그를 보고 소리를 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견디고 있는 나(“침묵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두 사람이 벌이는 장면은 떠올리기만 해도 마치 몰입한 연기를 보는 것처럼 극적이다. 간신히 고통스런 그 감정을 유지한 채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에서” 나는 연민에 사로잡혀 짧지 않은 시간을 떠나지 못한다.
둘째 이야기는, 깊어진 밤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 것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나’다. 다 퇴근해버린 사무실, 아직 일이 있어 혼자 남아 나는 창밖의 눈을 보면서 우연히 ‘그’를 떠올린다. 그리곤 느닷없이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독백처럼 의미심장하게 읊조린다. 이 말은 참 신비하다. 그 사이에 나의 의식의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오래 전 사건과 오늘의 사건은 동일한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제는 내가 어느새 캄캄함 속에서 홀로 불 밝히고 있는 과거의 그 서기(書記)가 되어 몰두하는 인생은 어리석지 않음을 발견하고 있으니.
명민한 시인은 그것을 ‘그리고 나는 우연히’로 시작하는 두 시행으로 만들어 처리한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 시의 ‘눈’에 해당하는 구절이다. 1연과 2연이 11행과 3행으로 부피의 차이는 있지만, 무게는 동등하다. 아니, 뒤의 것이 더 무겁다. ‘그리고’라니? 시인은 왜 하필 이 접속 부사를 썼을까? ‘그리고’는 병렬적으로 연결할 때 쓰인다. 시인은 그것을 아직도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느낌을 주기 위하여 사용한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그러나 사실은 심각하게.
화자인 ‘나’가 과거의 ‘그’를 떠올리는데 나도 그 입장이 되면서 과거에 참 안 돼 보였던 그가 실은 충만한 존재라는 실감을 뒤늦게 하게 된 것이다. 시인은 그 사내를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 지나쳤다는 인식. 그래서 제목이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 되었다.
서류뭉치는 현대사회의 각박함과 중압감을 암시하는 소재이며, 눈, 밤, 사무실은 과거 장면과 현재 상황을 연결하는 회상의 매개체다. 기형도는 그런 사소한 풍경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시인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들이 지나치고 마는 풍경, 문장을 느닷없이 엄청난 미학으로 끌어올리는 시인이다.
“그리고”처럼 새해의 첫날이, 며칠이 우리 앞에 당도했다. 어제와 오늘은 다 같은 ‘그리고’의 하루이지만, 엄연히 다른 하루다. 새해의 나날은 이런 깨달음을 수반하는 날들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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