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상은 어려서 집안 어른 이정훈(李鼎勳)에게 수학하였고, 타고난 자질이 온화하고 맑으며 총명하였다.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고, 어른을 모실 때 말과 행동이 늘 공손한 태도였으며, 몽암(蒙庵) 정희(鄭熺)와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학문에 소질이 있었다.
1807년 식년시, 1813년 대증광시 병과에 거듭 합격해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에 그리 마음이 없었다. 당시 영남의 사림들 대부분은 당쟁과 사화의 논란으로 벼슬에 나아가길 멀리하고 초야에 은신해 수신과 학문을 닦는데 집중하였는데, 이원상 역시 50세가 넘는 나이에 진사에 합격해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면서도 그의 호에 담긴 의은(依隱) 뜻처럼 고향에 머물렀다.
양좌동에 빼어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그의 아들 물와(勿窩) 이재직(李在直,1805~1837)은 1827년, 손자 노석(老石) 이능섭(李能燮,1812~1871)은 1848년 대증광시에 잇달아 급제하였다. 특히 이능섭은 경주부윤과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을 지내며 집안을 드러내었는데, 이들 3대는 양동마을의 오랜 역사와 전통을 보여주는 주요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사후에 송도산(松禱山)에 장사지냈다가 1876년에 노동(蘆洞) 무첨공 묘소로 이장하였다. 입재(立齋) 정종노(鄭宗魯)는 행록(行錄),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1827~1899)은 묘갈명, 내헌(耐軒) 이재영(李在永)은 묘지후서 그리고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과 학서(鶴棲) 유태좌(柳台佐) 등이 만사와 제문을 지어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김흥락은 정재 유치명의 제자가 되면서 이황·이상정·유치명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주요한 학통을 계승한 인물로 거론되는데, 이원상의 외손자가 된다. 그는 외조부를 위해 「外王考啓功郞承文院正字贈通政大夫弘文館副提學依隱李公墓碣銘 幷序」묘갈명을 지어 바른 행실의 선비를 선양하였다.
선비가 비록 높은 벼슬에 오르지 않아도 후손이 번성해 입신양명을 이루면 절로 선대의 입지가 높아졌으니, 이재영은 「宗叔依隱公墓誌後敍 遷厝時」종숙의 묘소를 다시 이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숙 의은 이공 묘지후서 - 내헌 이재영
부군의 의관을 묻은 곳은 송구(松邱:송도산)에 있는데, 주갑(周甲,60년)을 세 번 지난 병자년(1876)에 이르러, 노동(蘆洞)의 무첨공(無忝公) 묘소 오른쪽 신좌(辛坐)의 언덕에 옮겨 모셨다. 이는 대개 군수공(郡守公) 이재정(李在正)의 유지에 따라 개장한 것이며, 그 뜻을 이룬 이는 증손 이용구(李容久)이다.
아! 부군께서는 무첨공에 대하여 7대를 이어온 적통의 후손이신데, 이제 200여 년이 지난 뒤에 이곳에서 함께 봉분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지척의 거리에서 묘역을 마주하고 있으니, 마치 혼백이 서로 곁에서 모시는 듯합니다. 이 일이 어찌 우연이라 하겠습니까.
손자 이능섭이 조정에 벼슬하여, 경오년에 이조(吏曹)의 아경(亞卿)에 발탁되었고, 공에게는 홍문관 부제학이 추증되었으니, 또한 매우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공께서는 일찍이 ‘의은(依隱)’이라 스스로 불렀으나, 평생 겸손하고 덕을 지켜 스스로를 내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셨습니다. 이에 처음 장사지낼 때 임하(林下) 이경유(李敬儒)가 그 행적을 기록하였고, 이경유는 부군과 깊이 뜻이 통하여 행적과 관직의 추증에 이르기까지 모두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나, 오직 호(號)만은 적지 않았으니, 이는 공의 겸덕(謙德)이 어디에 있는지를 친히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감히 다시 한마디를 보태지 않고, 다만 이장하여 봉안한 연월일과 자손의 계보만을 서술하여, 옛 기록의 곁에 덧붙여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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