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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기쁨에게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12호 입력 2025/12/26 12:49 수정 2025/12/26 15:46

슬픔이 기쁨에게

 

                                                            정호승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모든 감정의 근원이자 바탕인 슬픔


  

손진은 시인확대
손진은 시인
제목만 보면 이 시는 슬픔이 기쁨에게 주는 말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 겠다”가 일곱 번이나 반복되는 이 시의 구조를 보면 ‘나’는 ‘슬픔’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적 화자 ‘나’는 슬픔의 의미를 아는 절대자 같은 존재다. 그 ‘나’가 소외된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한겨울 노점 할머니의 귤 값을 깎았다고 기뻐하는, 동사자의 죽음에도 무관심한 존재인 ‘너’에게 발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이 시는 상식을 깨뜨리는 역설적인 발상으로 성찰적인 시의 성격을 한층 강화한다.

시적 화자는 타인의 처지에 무관심한 ‘너’에게 이 ‘슬픔’을 주겠다고 한다. 슬픔을 모르는 이에게 슬픔을 느끼게 해주는 일은 저주가 아니라 배려이다. 이 슬픔은 “사랑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고 한다. “평등한 얼굴이라니? 이 말은 슬픔이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는 모든 감정의 근원이자 바탕이라는 말이다. 슬픔, 그 근원 감정을 알아야 남의 기쁨에 “평등하게 웃어” 줄 수도 있고, 아픔도 보듬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화자는 따뜻한 사랑이 절실한 존재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다림을 주겠다고 한다. 그 소중한 감정을 알 때까지 함박눈으로 상징되는, 가진 자만이 누리는 기쁨을 멈추겠다고 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봄눈들을 데리고 /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온 다음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걸으며,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나는 천천히 기다려주는 그 ‘슬픔’까지 맛보겠다(“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많은 현실주의 시들과 달리 이 시는 “귤 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오늘날의 무수한 ‘너’를 참고 기다리면서 그들의 내면을 일깨우는 힘을 가지고 있다.

다시 ‘슬픔이 기쁨에게’라는 제목으로 돌아와서 더 넓게 생각해 본다. 시인은 신(‘나’)의 목소리를 빌어 ‘너’에게 발화하고 있지만 내밀하게는 ‘모든 감정의 근원이자 바탕’ 그 자체를 가진 인간을 ‘슬픔’으로, 타자의 처지에 “무관심”하고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인간을 ‘기쁨’으로 환치하여 시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의 미묘한 울림을 포함하여 ‘슬픔’이라는 감정을 이렇게 새롭고도 깊게 개진한 이는 정호승 이전에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가 도달한 슬픔이라는 감정은 그의 시에서 시적 에너지가 되었음은 물론 우리 시단에서도 소중한 시적 자산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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