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서럽게 울던 아기도 단맛에는 활짝 웃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발걸음을 옮기는 어르신 주머니에는 사탕 몇 알이 꼭 들어있고요. 생애 시작부터 마지막 단계에 이르기까지 단맛은, 가장 익숙하고도 오랜 감각입니다. 하지만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도 반드시 있는 법. 이제 그 대가를 고민할 때입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한국 성인 비만율은 34.4%(2024년 기준)라고 한다죠? 성인 3명 중 1명이 비만이란 뜻입니다. 당뇨 전단계까지 합쳐보면 성인 인구 절반 가까이가 ‘혈당 이상 상태’라고 합니다. 설탕이 대중화되다 보니 당뇨병마저 대중 질환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세속에 무심한 종교 영역에서도 설탕만은 예외입니다. 기독교에서는 단맛을 경계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성경이 묘사할 수 있는 축복의 가장 높은 비유지만, 동시에 과잉의 기준점이기도 합니다. 베네딕트 규칙(Rule of Saint Benedict) 류의 수도원 식단 기록에서는 설탕을 약(藥)이나 환자용 치료 식품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달콤함은 결코 쾌락과 탐닉의 대상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입의 즐거움은 곧 몸의 쇠락을 부른다(잡아함경)”고 경고합니다. 설탕을 꼭 집어 말하는 건 아니지만 윤회의 무한 챗바퀴에 사람을 붙들어 매는 잔인한 유혹으로 질타합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죠. 라마단(Ramadan: 이슬람교에서 단식(斷食)과 재계(齋戒)를 하는 달) 기간이 끝나면 단 음식은 허용하지만, 그 과한 섭취는 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단맛은 관리와 절제의 대상이란 의미입니다.
달콤함은 아이러니입니다. 알고도 먹고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입에 넣는 유혹의 열매와 같다고나 할까요. “딱! 한 입만”이라는 주문은 다이어트 실패의 가장 전형적인 의식문입니다. 뇌를 스캔해 봤더니, 설탕이나 아편과 같은 남용 약물(abuse drugs)이나 뇌 반응이 동일하다고 합니다. 일정 기간 규칙적으로 설탕물을 먹인 쥐는 21일이 지났는데도 그 맛(쾌감)을 유지하고 있었다네요. 뭐든 반복하면 보통은 자극에 둔해지고 반응이 줄어들기 마련인데... 뇌 보상 중추(NAc)에서 갑자기 상승한 도파민이 3주 동안 유지되었다는 말은 ‘중독’이란 단어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불교 우화 중에 코끼리에 쫓기는 사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난 코끼리(세월을 상징)를 피해 나무줄기 몇 가닥에 의지한 채 겨우 우물 속에 몸을 숨겼지요. 하지만 웬걸 그 줄기마저 흰쥐 검은 쥐(낮과 밤)가 갉아댑니다. 그렇다고 밑으로 내려가자니 독이 잔뜩 오른 뱀(탐욕·성냄·어리석음의 독)만 가득합니다. 꼼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아카시아였는지 사내 뺨에 꿀 몇 방울이 떨어집니다. 우연히 입에 들어온 달콤함에 사내는 자신이 처한 (중생의) 상황도 잊어버리고 꿀이 안 떨어지나 두리번거리며 입맛만 다시더랍니다.
노인 손에 든 사탕은 저혈당을 막고 응급실 포도당은 생명을 살리는 감로수입니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 아니었으면 18세기 산업 혁명과 그로 인한 기술 발전은 불가능했지요. 미시적으로도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값싸고 빠른 열량 충전원은 설탕이었고요. 한때 인류를 살렸던 설탕이 이제 천천히 인류를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중요한 것은 단맛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아닐까 싶네요. 비만과의 ‘전쟁’ 중인 영국이 청량음료에만 적용해 온 설탕세(稅)를 이제 밀크셰이크와 카페라테로 확대 적용하겠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구독자님들, 저와 함께 설탕 조금만 줄이시고 더욱 건강한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홈
오피니언
연재
박성철의 문화단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