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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 K-콘텐츠의 원조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06호 입력 2025/10/30 10:57 수정 2025/10/30 11:02
해외로 간 원효

 

일본 고산사 소장 원효 영정.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확대
일본 고산사 소장 원효 영정.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원효의 철학과 사상은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중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영향을 주었을뿐만아니라, 인도, 중아아시아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까지 7세기의 원효를 뛰어넘는 한국인은 없다. 원효가 저술한 책은 100여 종, 20여 권에 이른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술활동에 있어서도 원효를 능가하는 사람은 없다. 원효와 관련된 자료는 한국보다는 오히려 중국이나 일본에 더 많다.


중국


-중국인들이 읽은 『금강삼매경』·『대승기신론소』

원효의 『금강삼매경』을 읽은 중국의 어느 고승이 “이것은 부처의 경지에 비교되는 보살의 경지에서만 나올 수 있는 저술이므로 마땅히 소(疏)가 아닌 론(論)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본래는 『금강삼매경소』 였으나 중국에서 『금강삼매경론』으로 하며 최고로 높여 칭하였다. 붓다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경(經)이며, 보살의 경지에 이른 책이 론(論)이다.


원효의 또 다른 대표 저서 『대승기신론소』는 『대승기신론』에 대한 원효의 주석서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책으로, 어렵고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효의 주석이 단연 최고로 치며 ‘해동소(海東疏)’라 하며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두었다. 『대승기신론소』는 대승불교의 교과서 같은 역할을 하며 아시아 전역에 알려졌다. 10세기경 요나라의 황제 도종이 고려를 통해 들여온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찬양한 기록이 존재한다.

-『송고승전』 등 기록 속의 원효
당나라 유학길에서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은 원효의 「오도송」에 대한 기록이 중국의 『송고승전』과 『종경록』에 전해지고 있다. 이외에도 11세기의 『임간록』, 17세기의 『지월록』 같은 중국 문헌에도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송고승전』에는 원효가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강의한 내용도 전해지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원효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다.


“원효의 발언은 미친 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지공과 같이 금빛 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기도 했고,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고, 혹은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여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설화속 원효
중국 사람이 원효를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살펴볼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가공되거나 과장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몇 가지 예가 있다.


당나라의 사찰 성선사(聖善寺)에서 불이 난 것을 신라에 있는 원효가 알아채고 비를 내려 불을 끈다거나, 당나라의 운제사(雲際寺)가 무너져 내릴 것을 알고 원효가 소반이나 널빤지를 던졌는데, 이것이 그 사찰의 마당에서 날아다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승려들이 나오는 통에 사찰이 무너지기 직전 목숨을 구했다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렇게 신통력으로 도움을 받은 당나라의 승려들이 원효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신격화된 원효의 모습이다.


일본 


 

일본에서 발견된 판비량론.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확대
일본에서 발견된 판비량론. <사진=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일본에서 원효의 존재는 상상을 뛰어 넘는다. 의상은 화엄종, 원효는 정토종의 개조(開祖)로 여기고 있다. 특히, 원효의 경전과 사상이 일본으로 전해진 흔적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잔지(高山寺)의 원효영정과 화엄종조서회전(화엄연기)
교토 고잔지(高山寺)에는 가장 오래된 원효의 영정이 있다. 분황사, 국립현대미술관 등 국내 여러 곳에도 있지만, 원효를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그림이 바로 고잔지(高山寺)에 있는 원효의 영정이다. 벗어놓은 신발, 더부룩한 턱수염, 햇빛에 탄듯한 검은 얼굴빛, 살아있는 눈빛 등이 특이하다.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이모본이며 일본풍이 아니라 한국풍이다. 일본 화승이 한국의 것을 베낀 것인지, 아니면 한국 화승이 그려다 준 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 양식에 충실한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이곳에는 원효와 의상의 진영도 함께 모시고 있다.


이 절을 창건한 승려 묘에(1173~1232)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을 모시는 것외에도 『화엄경조사회전(華嚴經祖師繪傳)(약칭 화엄연기)』이라는 그림책을 만들게 했다. 두 스님의 생애와 행덕을 기리는 두루마리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송고승전』 권 4 원효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한국인 원효를 기록한 중국의 책을 참조해서 일본인 화승이 그렸다. 한·중·일 동아시아에 걸쳐진 원효의 존재감이다. 현재 일본의 국보로 교토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젠린지(禪林寺)의 머리 돌린 불상
일본의 정토종 계열은 대체로 원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일본 정토종 쥬린지(禪林寺)에는 원효가 쉰다섯 살 때 쓴 『무량수경종요(無量壽經宗要)』 필사본이 전해진다.


이곳에는 뒤돌아보는 아미타여래상이 있고, 정면으로 향하고 있으면서 머리를 남동쪽으로 돌리고 있다. 원효 사후 400년 뒤인 가마쿠라시대(1192~1330)에 만들어졌다. 경주 분황사에는 그 옛날 설총이 만들었던 머리를 돌리는 원효소조상이 있었다. 설총이 예를 올리면 뒤돌아보았다는 소조상에 대한 기록이 『삼국유사』의 「원효불기」 편에 전해진다. 이곳 젠린지(禪林寺)의 불상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서당화상비의 내력
『금강삼매경론』을 비롯한 원효의 여러 책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관리이자 문인 오미노 미후네는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동하였는데, 779년 신라에서 온 사신 설중업(薛仲業)이 원효의 손자라는 사실에 감격한 나머지 아래의 시를 지어 주었다.

원효거사의 『금강삼매경론』을 읽고 감동했는데 (嘗覽元曉居所著金剛三昧論)
그 사람을 보지 못해 깊이 아쉽거늘 (深恨不見其人)
이제 그 후손과 만나니 기쁘도다 (而喜遇其孫)
기꺼이 시를 써서 전해야지 (乃作詩贈之)


설중업이 일본에서 몸소 느낀 할아버지 원효를 추모하기 위해 주석했던 고선사에 세운 비가 <서당화상비>이다. 1914년 암곡동 고선사터에서 하단부, 1968년 경주시 동천동에서 상단부가 두 번에 걸쳐 발견되어 원효 연구에 귀중한 단초를 제공했다. 서당화상비 비편과 귀부는 경주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판비량론』
『판비량본』은 원효의 저서 가운데 발간 연도와 장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책이다. 원효가 55세이던 671년(문무왕 11년) 행명사(行名寺)에서 중국 당나라 삼장법사 현장(玄奘)의 유식(唯識), 비량(比量)을 비판적으로 논증한 책이다. 현장이 대승 불교 유식학파의 사상을 논리학(인명학)을 이용해서 논증한 것을 원효가 논리적, 비판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발견된 것이 아쉽고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


1960년대 어느 일본인 학자가 엿장수가 엿을 싸주는 종이로 사용하는 것을 발견했다. 앞부분은 이미 사라지고 겨우 10장만 남아 있었다. 현재 교토의 오타니대학에 보관되고 있다. 누군가가 필사를 했는데 워낙에 달필이라 소장가치가 높다고 한다.

치아이 히로시 교수가 교토 긴자의 고미술상에서 원효의 판비량론 1부를 더 발견하였다. 교토에서 발견된 이 책은 오타니대학본과 구분하여 바이케이본(梅溪本)이라 부른다. 여기서 발견된 각필(角筆)이 일본 문자 가타카나의 기원으로 보인다는 학설이 발표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기도 했다.


이외에도 원효의 여러 저서들이 일본에서 널리 읽히고 인용되었다. 『열반경종요』는 원효가 열반경의 내용을 집약하고 핵심을 정리한 해설서이다. 1124년도 필사본을 일본 일본 닛코의 린오사(輪王寺)에 소장하고 있다. 일본 신수대장경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책의 서문은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인도 그리고 중앙아시아


인도 유식학파의 고승으로, 보살으로 불린 진나(陳那)의 문도가 당나라에 와서 『십문화쟁론』을 읽고 춤을 추며 찬탄하고는 인도로 역수입해 갔다. 순고의 『기신론본소집청기』에 실린 다른 기록에서는 진나의 문도가 『십문화쟁론』 보더니 “이 원효라는 사람, 우리 스승님(진나)의 후계인가?” 라고 하며 인도로 가져갔다고 나온다. 인도의 스님들이 자국의 스승과 동일시할 정도로 그 위엄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원효는 당시 여러 종파로 나뉘어 있던 신라 불교이론을 화쟁사상을 통해 하나의 이론으로 융합시켰는데, 화쟁사상을 담은 『십문화쟁론』은 불교가 발생한 종주국 인도에까지 명성이 알려졌고 범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10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대승기신론소』 필사본이 돈황 동굴안에서 발견되었다. 중앙아시아까지 전해져 많은 사람들이 원효의 책을 필사하고 배웠다는 뚜렷한 증거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그러하듯, 원효의 책도 유럽의 문화재 사냥꾼들이 가져간 서책 중에서 더 나올지도 모른다.

-k 콘텐츠의 원조 원효
원효의 영향력은 최근에까지 미치고 있다. 원효를 연구하며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들이 많다. 1969년에 발표된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풍요의 바다』 제1권 초반부에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는 설화를 인용했다.


원효와 의상의 이야기는 독일의 대표 소설가 헤르만 헷세의 소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의 소재가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다.


임진왜란 등 한반도를 침략한 일본인들은 비교적 가져가기 편한 서책이나 수월관음도 같은 그림들을 둘둘 말아서 가지고 갔다. 슬프지만 한반도의 귀중한 자료들이 우리나라 보다 일본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수행자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이자 사미들이 가장 먼저 읽는 책 『발심수행장』에서 원효는 말했다.

 
“수행과 지혜를 갖춤은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나와 남을 이롭게 함은 새의 양 날개와 같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 원효의 이름이 첫 새벽이라는 뜻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k-철학, k-문학, k-사학을 아우르는 k-인문학의 창시자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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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식 시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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