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홈 홈 오피니언 연재 경주인문학산책

한국불교의 체계를 정립한 원효의 노래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02호 입력 2025/09/25 13:27 수정 2025/09/25 13:31

 

원효가 주석하며 많은 책을 편찬했던 분황사. <사진=분황사>확대
원효가 주석하며 많은 책을 편찬했던 분황사. <사진=분황사>
원효(617~686)는 한국불교의 체계를 세우고 정립한 위대한 스승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이다. 종교를 넘어 한국의 철학과 사상의 위상을 높힌 원효를 부르는 이름은 많고 다양하다. 원효성사, 원효대사, 원효보살, 해동보살, 해동성사, 해동법사, 해동종주, 서당화상, 고선대사, 백부논주, 소성거사, 복성거사 등 이외에도 참 많다. 활동 영역이 깊고 넓은 까닭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명인 원효대사로 불린다. 이따금 결정적 순간에 원효가 부른 노래는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깨달음의 노래


당나라로 건너가 불법(佛法)을 배우고자 했던 원효의 1차 입당구법(入唐求法)은 고구려 병사에게 잡혀 무산되었고, 10년 뒤 661년(무무왕 1년) 육로 대신 해로를 찾아 나섰다. 비바람을 피하던 토굴이 무덤이었고, 지난 밤 갈증을 해소시켜 준 물이 해골물이었던 것을 깨닫는 순간 중국가서 회엄학을 제대로 배우고자 했던 열망을 접고, 대신 경주로 되돌아 왔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이치를 깨닫고 노래한 것을 사람들은 원효의 ‘오도송(悟道頌)’이라 한다.

心生故種種法生
心滅故龕墳不二
三界唯心萬法唯識
心外無法胡用別求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로다
마음이 일어남에 온갖 것 생겨나고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認識)이라
마음 밖에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구하랴.


『대승기신론』의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心生則種種法生) 마음이 사라지니 온갖 법이 사라진다 (心滅則種種法滅)”는 내용과 같거나 비슷하다. 불교 교리의 핵심인 마음의 세계를 인용하여 깨달음의 순간을 노래했다.


황룡사의 노래


왕립 호국사찰인 황룡사에서 고승 대덕 100여 명이 참석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가 열리는데 원효는 왕실과 귀족불교 중심인 기득권 불교계로부터 배척당하며 끼이지 못하고 있었다. 당나라에서 들어온 『금강삼매경』을 입수한 신문왕이 설법해 줄 스님을 찾던 중 대안스님의 권유로 마침내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할 수 있었다.


원효는 『금강삼매경』을 소의 두 뿔 사이에 벼루를 매달아 두고 소의 등위에서 해설서를 4일 만에 5권을 썼다. 하지만 누군가 훔쳐가는 바람에 요약집을 다시 써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금강삼매경』을 해설할 수 있는 사람은 원효가 유일했다. 강의를 마치고 사자후같은 한 소리를 내질렀다.

“지난 날 서까래 100개를 고를 때는 끼지 못했었는데, 이제 용마루 하나를 고르는 자리에는 나 하나만이 있구나.”

황룡사 강의는 변방에서 주류사회의 진입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기득권 세력에게 한방 먹이는 아웃사이더의 통쾌한 설법이었다.


『금강삼매경론』은 『금강삼매경』을 해설한 주석서이다. 보살의 경지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라 하여 『금강삼매경소』에서 『금강삼매경론』으로 격상하여 불렀다. 『대승기신론』과 더불어 원효를 대표하는 저서로 꼽는다. 중국과 일본으로까지 전파되어 널리 영향을 주었으며 해동보살이라 일컫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송고승전』에 전해지고 있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강의한 황룡사지. <사진=경주시>확대
원효가 금강삼매경을 강의한 황룡사지. <사진=경주시>


몰부가(沒斧歌)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나/ 나는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을 깎으려네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도끼자루는 남성, 자루없는 도끼는 여성을 뜻하는 일종의 구애가이다. 2구로 된 짧은 노래는 『삼국유사』 권 4 「원효불기」에 전한다. 사람들은 이 노래의 뜻을 알지 못했으나 태종 무열왕이 알고 있었다. 관리들을 보내 데려오게 하자 원효는 문천교에서 일부러 물에 빠져버렸다. 무열왕은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된 요석공주의 거처인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며 쉬도록 하여 부부의 연을 맺도록 도왔다. 6두품 출신 원효와 요석공주는 혼인을 할 수 없는 사이였지만, 김춘추는 역시 큰 뜻으로 큰 인물임을 알아보았기에 가능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설총은 이두 문자를 집대성하였고, 통일신라 3대 문장가로, 유학의 종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불교에서 남자불자를 거사라고 부른다. 원효는 머리를 기르고 백성들의 옷으로 갈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 복성거사(卜性居士)로 낮춰 불렀다. 복(卜)의 뜻은 아래 하의 밑부분 한없이 낮은 사람이는 뜻이다.


이규보의 『동문선』 제50권 「소성거사 찬」에 재미있는 글이 있다.

머릴 깎아 민머리면 원효대사(元曉大師),
머릴 다듬어 관을 쓰면 소성거사(少性居士)
나타나는 모습이 천 가지 백 가지라도,
손바닥에 손가락 대기만큼 간단할 뿐이다.
이 두 모습은 그저 한바탕의 놀이일 뿐이지.



무애가(無碍歌)


원효는 분황사에서 가장 난해한 경전인 『화엄경』 해설서인 『해엄경소』를 짓다가 제4권 「십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내던지고 절필했다. 경전보다는 저잣거리 속으로, 자각이타의 실천으로, 급격한 무애행으로 방향을 선회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불교에서 회향이란 지금껏 쌓은 공덕을 중생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한다. 경전보다는 중생 가까이로 다가가는 일이 중요했다. 거지, 광대, 시장 상인과 술을 마시며 춤을 추며 어울리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무애가란 화엄경의 ‘아무 거리낌 없는 사람은 한가지 도로써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에서 비롯된다. 원효가 지었다는 무애가(無碍歌)는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단지 노래의 유래에 관한 내용이 『삼국유사』와 고려의 문인 이인로의 『파한집(破閑集)』에 전해지고 있다.


『파한집(破閑集)』에는 원효가 표주박을 북처럼 두드리며 저잣거리에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니 이것을 무애라 했다. 이후에 사람들이 호리병에 금으로 만든 방울을 달고 채색비단을 장식하여 두드리며 음절에 맞게 춤 동작을 하고 여기에다 경론에서 가려뽑은 게송을 덧붙여 부르니 무애가라 하였다. 어른은 물론 밭가는 노인까지 본받아 놀았다고 전한다. 원효 덕분에 무지몽매한 사람들조차 부처의 존재와 아름을 알게 되었다.


원효의 노래는 무애가가 되고, 춤은 무애무(無碍舞)가 되어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까지 궁중에서 공연예술로 발전되어 전승되어 왔다. 무애무가(無碍無歌)는 1829년(순조29)에도 선을 보인 기록이 존재할 만큼 근세에까지 명맥이 이어져 왔다. 훗날 대중들이 불렀던 무애무가 하나를 예를 들어본다.

“양소매를 휘두르는 것은 두 가지 번뇌를 끊었기 때문이요. 발을 세번 드는 것은 삼계를 초월했기 때문이라.”
“배는 가을 매미같고 목은 여름 자라같은데, 그 굽은 것은 뭇 중생이 따를만 하고 그 빈 것은 만물을 받아들일만 하네.”


민중 속으로 걸어 들어가 대중포교에 전념한 원효의 사상을 ‘귀심일원 요익중생(歸心一願 饒益衆生)’으로 요약한다. 유사한 말로 불교에는 입전수수(入廛垂手)라는 말이 있다. ‘세상으로 들어가서 손을 내민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성스러운 깨달음을 성취하고 다시 중생 속으로 돌아와서 아픔을 함께한다는 말이다. 성과 속을 벗어난 깨달은 자, 초월자의 새로운 시작이다. 절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십우도의 마지막 그림이 이에 해당한다. 근세의 선승 경허도 절을 버리고 함경도 산수갑산 산골로 들어가서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일도 무애행이다.

경전 안에서 경전 밖으로, 절 안에서 절 바깥으로, 크게 깨달은 자의 무애행은 바로 중생 가까이 다가가는 일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 또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발현이다. 바로 붓다의 마음이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의 계기가 된 문천에서 바라본 월정교. <사진=경주시>확대
원효와 요석공주의 만남의 계기가 된 문천에서 바라본 월정교. <사진=경주시>


쉬운 노래, 많이 부르는 노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薩)”

불자들이 부르는 가장 쉬운 노래이자 가장 많이 외는 기도문이다. 나무는 귀의하다, 아미타불은 서방정토 극락에 머무는 아미타부처님을 뜻한다. 관세음보살은 중생들의 소리를 가장 잘 들어주고 도와주는 보살이다.

불경을 읽을 줄 모르는 대중들을 위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만 외우면 죽어서 극락(極樂)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파(傳播)한 것은 당시에 혁신 또는 혁명에 가까웠다. 글을 모르는 우리 할머니도 할 줄 아는 것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 것 뿐이었다.


원효는 686년(신문왕6년) 3월 30일 70세 나이로, 아들 설총의 집 근처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내용이 고선사지 터에서 발견된 서당화상비에 기록되어 있다. 1400여 년 전 이 땅에 온 원효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주고 갔다. 원효 사상을 크게 일심, 무애, 화쟁으로 나누기도 한다. 수많은 학자들이 원효의 사상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원효가 그러했듯이 대중과 함께 실천할 수 있는 것을 찾는 일이다. 탈종교시대에 원효가 답을 찾아줄지도 모를 일이다.


원효는 『열반경 종요』에서 “이미 건너야 할 저쪽 기슭이 없는데, 어찌 떠나가야 할 이쪽 기슭이 있으랴”고 말했다. 피안과 차안의 분별이 떠난 자리, 옳고 그름의 분별이 사라진 곳에 중도(中道)라는 깨달음의 이치가 있지는 않을까.


높고 낮음, 있고 없음이 사라지고 너와 나의 구분 마저 사라지고 나면 원효처럼 노래 부르며 덩실덩실 춤을 출 수 있는 세상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확대
전인식 시인(전문기자)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