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파 선생이 돌아가신 후, 최염 선생 역시 한동안 울분에 쌓여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를 원망하며 실의에 찬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경주최부자의 종손으로서 할아버지를 도와 좀 더 뜻있는 일을 하지 못한 채, 두 눈을 번연히 뜨고 할아버지가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모든 가계의 재산을 털어 세운 대학을 도둑질 당한 것이 애통하고 송구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그 울분이 최염 선생의 몸과 마음을 난자하는 가혹한 사건을 만들 줄이야...!
“박정희에게 재산과 대학까지 바친 너는 얼마나 부귀영화를 누리냐” 친구의 비아냥에 최염 선생의 화가 폭발했다.
그 이듬해 어느 날, 최염 선생은 무교동의 ‘일번지’라는 맥주집에서 친구 두 명을 만나 담소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중 한 명은 의사였고 또 한 명은 사업하는 친구였다. 그중 사업하는 친구가 세관에서 근무하던 친구 이야기를 문득 꺼냈다. 그 친구는 삼성이 울산에 한국 비료를 지을 때 이병철 회장의 아들인 이창희 씨가 일부러 관세청에 손을 써서 울산세관 감시과장으로 보냈던 친구였다. 당시 그 친구는 감시과장으로 있으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최염 선생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 사실만 봐도 사카린 밀수 사건은 밀수라기보다는 세관까지 동원되어 필요한 모든 편의를 봐주는 ‘기획밀수’였다‘고 토로했다.
이야기가 거기에서 그쳤으면 별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친구의 치부 이야기를 꺼낸 친구는 최염 선생에게 농담조로 이렇게 비아냥대기 시작했다.
“야, 그 친구는 그 잘난 감시과장 한자리하면서도 그렇게 잘 살게 되었다는데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 재산을 갖다 바친 너희 집안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부귀와 영화를 누렸겠냐?”
아무리 농담이라도 가려야 할 말이 있다. 이병철 회장과 박정희로 인해 가문의 전재산이 송두리째 엉뚱하게 쓰이고 있는 판에 이런 말을 들으니 최염 선생의 피가 끓어올랐다. 마침 그 친구는 이병철 회장의 아들 이창희 씨와도 친구였다. 때문에 삼성과 최부자댁 사이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만한 친구였다. 딴에는 농담이라고 말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집안의 내력을 번연히 알고 있는 그가 그토록 막돼먹은 말을 한다는 것이 최염 선생을 격동시켰다. 그 자리에서 박정희와 이병철에 대해 욕을 퍼부었다.
“이병철과 박정희는 희대의 전경유착으로 나라까지 팔아먹을 놈들이다.”
그 목소리가 좀 컸던지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힐끗힐끗 선생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래도 선생은 흥분해서 두 사람을 성토했다. 그러자 친구들은 술 마시던 도중에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걸 모른 채 혼자 술마시던 최염 선생 앞에 낯선 장정들이 몰려와 다짜고짜 선생을 끌어내어 차에 태워 어디론가 끌고 가버렸다.
그 당시에는 시중의 술집이나 다방 같은 곳에 수시로 경찰들이 드나들면서 ‘반공이니 방첩’에 대한 교육을 하던 시기였다. 학교에서도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반공교육이나 간첩 구분 요령 이를 테면 ‘시내에서 진흙 묻은 구두를 신은 사람’, ‘바지 뒷주머니가 하나인 사람’, ‘정부를 비방하는 사람’ 등은 간첩일 확률이 높다는 식의 교육과 삐라를 주웠을 때의 신고 요령 등을 수시로 교육시키고 있을 때다. 그러니 자칫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정부나 대통령을 비방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경찰서에 끌려가 죽도록 얻어맞거나 징역을 살아야 하는 비민주적이고 무법천지인 나라였다.
“나는 신분도 확실하고 전과도 없었어요. 게다가 나도 한다하는 인맥을 가진 사람이었으니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착각이 나를 구렁텅이에 밀어 넣은 것이었어요.”
선생이 끌려간 곳이 어딘지 아직도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은 선생을 어느 음침한 곳에 처박아 넣고는 인정사정 두지 않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맞아도 이유라도 알고 맞으면 억울하지는 않을 텐데 무턱대고 두들겨 맞다가 보니 공포가 더 컸다고 한다. 이렇게 맞다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마침내 매가 그쳤다. 너무나 심한 매질에 선생은 까뭇하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느 빈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도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계절이기도 하지만 극한의 공포와 낯선 방의 어둠은 고통과 함께 지독한 오한을 동반하며 몸을 짓눌렀다. 선생이 정신을 차리자 예의 낯선 사람들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 여러 장의 진술서가 들려 있었다.
“기가 막혔어요. 그 진술서에 내가 북한을 찬양했다는 맥주홀 종업원의 진술이 들어 있었어요. 심지어는 자기들을 향해 북한에 가면 남한보다 훨씬 살기 좋으니 함께 가자고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진술이 적혀 있었어요.”
“무슨 소리요? 나는 이런 말 한 적이 없소”
그러자 다시 매질이 시작되었다. 바른대로 불라는 소리도 연이어 들려왔다.
“너, 간첩이지. 그러니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고 다닌 거 아냐?”
선생은 매를 맞으며 속으로 ‘아하, 이제 내가 간첩 누명을 쓰는구나’는 생각했다. 당시에는 이런 간첩 조작 사건쯤 아무것도 아니었다.
혹독한 고문 후 최염 선생에게 내밀어진 자술서에는 KAL기 피해자 가족들에게 북한을 찬양했다는 진술이 들어 있었다.
대표적인 조작이 1964년에 있었던 ‘인혁당 사건’이다.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은 순전히 날조된 사건으로 굴욕적인 한일외교 정상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비협조적이고 반항적인 인사들을 한 대 엮어서 간첩 및 내란음모죄를 덮어씌워 3년여의 실형을 구형한 희대의 조작극이었다.
나중에 이 사건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위해 제정된 유신개헌에 반대하는 민주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해 또다시 날조되었다. 중앙정보부가 직접 개입하여 조작한 2차 인혁당 사건은 1차 피해자였던 도예종 씨를 비롯해 무려 8명이 사형당하는, 이른바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비화 된다. 이때 사형당한 도예종 씨는 마침 최염 선생과도 친했던 분이었고 당시 극적으로 살아 남은 유일한 생존자 이현재 씨는 오랜 기간 최염 선생과 친분을 쌓았다고 한다.
“아무리 고문을 당해도 북한을 찬양했다는 거짓 자백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어요.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거짓 자백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더 장기적인 고통일 것이기 때문이었어요”
고문이 계속 되던 어느 때, 그들은 이번에는 어떤 여자 한 명을 불러와 선생과 대질시켰다. 맥줏집, 선생 테이블 당번 아가씨였다. 당시 맥주집들은 아가씨들이 근무하면서 아가씨 한 명이 맥주 테이블 몇 개를 관리하며 술 시중을 들어주거나 심심풀이 말 상대를 해주는 식으로 운영되었는데 그 아가씨가 바로 선생이 마시던 테이블 담당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질이란 명목상의 절차에 지나지 않을 뿐, 겁에 질린 아가씨는 그들이 시키는 대로 선생이 그날 북한을 찬양했다고 둘러댔다. 선생이 강경히 부인하자 이번에는 선생은 본적도 없는 아가씨 한 명을 더 불러와서는 또 다른 대질을 시켰다. 그 아가씨 역시 홀에서 테이블을 관리하는 아가씨였는데 자기도 분명히 선생이 북한을 찬양하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들은 거짓 증언을 쏟아내고 사라졌고 선생의 항변은 아무런 가치 없이 검은 감옥 속으로 흩어졌다.
“고통에 찬 시간이 며칠이나 지속되었는지 몰랐어요. 끓임없이 가해오는 고문 속에서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분명한 것은 나에 대한 일체의 소식을 그 방 밖으로 전하지도 못했고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
어느 뼛골 시리게 고통스러웠던 고문이 지난 후 선생은 6·25 때 피난 간 와룡암에서 방첩대에 끌려갔던 일이 떠올렸다고 술회했다. 그 간악한 보도연맹 사건 당시, 선생도 내남면 일대에서 자행된 그 사건에 연루되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때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죽음을 기다리다가 최부자댁과 인연 있었던 ‘박시창 대령’의 등장으로 기적같이 목숨을 구했었다는 것. 뒤에 알고 보니 선생이 고문당한 기간은 5~6일쯤 되었고 그 시간이 지난 후 서울지방 검찰청 공안부장 앞에 서게 되었다.
“읽어봐!”
흐릿한 어둠 속에서 몇 장의 종이가 내밀어졌다. 자술서였다. 그 내용을 읽던 선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기에는 ‘KAL기 납북자 가족들’에게 선생이 북한을 찬양하는 발언을 했다는 진술이 쓰여 있었던 것이다. 더 놀라운 것도 있었다. 그 진술서의 맨 아래쪽에 선생의 이름이 찍혀 있고 그 옆에 선생이 찍지도 않은 선생의 엄지 지장이 뚜렷이 찍혀 있었던 것이다.
‘실의에 빠진 KAL기 납북자 가족들을 흉보고 북한을 고무 찬양한 빨갱이’
그들이 몰고 가고자 했던 선생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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