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최식 선생에 대한 최염 선생의 조심스런 회고를 들으며 떠올린 것은 일제강점기를 산 뛰어난 문인들의 일화였다. 이 시대의 문인들은 주색잡기가 다반사였고 기괴하고 파격적인 언행들이 도처에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고 한량노릇이 다 정당화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망국의 청년들이 겪어야 했던 또 다른 억눌림의 표현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문파 선생이 자손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두 번째 이유는 유산 상속으로 인해 자칫 자손들 사이에서 분쟁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우리나라 유산상속이 조선시대 후기부터 문파 선생 당대까지는 장자 우선으로 흘러왔으나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근대화과정을 거치면서부터 균등상속으로 바뀌었고 이름난 가문의 경우에는 문중 소유의 재산과 개인소유의 재산에 대한 갈등으로 풍파가 생기는 일이 속출했다. 나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뒤에 돌아온 재산이니 다시 나라를 위해 내놓는 것이 합당하다 게다가 문파선생은 이미 일제강점기 백산무역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희사했던 만큼 해방 후에 돌아온 재산에 대해서는 그것이 당신의 것이나 문중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늘 해왔다고 한다. 최염 선생은 할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뒤에 돌아온 재산이니만큼 할아버지는 그 재산을 디시 나라를 위해 내놓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신 것이지요. 그런 의중 끝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집마저 깨끗하게 나라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말씀을 당신 스스로 다짐하듯이 하셨어요!” 그러나 문파 선생은 그 다짐을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손자인 최염 선생께 물어보셨다고 한다. “나는 그때 할아버지를 보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한참을 망설였어요. 그러나 이럴 때의 할아버지 의중을 나는 분명히 알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강경히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고 싶습니까?” 최염 선생이 거꾸로 할아버지께 여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문파 선생 역시 최염 선생의 뜻을 분명히 듣고 싶어 하셨다고 한다. 그때 문파 선생님의 말씀 “우리 집 재산은 내가 죽고나면 필경 니가 전부 관리해야 할 끼다. 물론 다 니께 될 거는 아니겠지만 집안의 기둥으로서 니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을 끼다. 그라이 내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있어도 니 동의 없이는 재산을 함부로 처분할 수 없지 않겠나” 나는 이 인터뷰를 하면서 최염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할아버지께서 손자의 진정한 의중을 물으셨을 때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최부자댁 재산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욕심이 생기지 않으셨냐고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순간 욕심이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 집 재산은 지금으로 치면 수천억 원에 이를 만큼 많은 재산이었어요. 상속제가 어떻게 바뀌건 상관없이 그 재산의 일부만 물려받아도 나는 평생동안 아무런 걱정 없이 호의호식하면서 떵떵거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 아닌가요.” 그렇게 헛웃음을 웃은 최염 선생이 다시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더 절박한 욕심 아닌 욕심이 있었어요. 그걸 할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될지 정하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 저정도 말씀하시면 그 속내는 더 강경할 것이라는 확신을 최염 선생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재산에 대한 욕심은 부려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얕은 생각에 하다못해 ‘사는 집’만큼은 제발 남겨주십사 하는 부탁을 드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마땅히 물려받을 집을 절박하게 부탁해야 하는 장손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문파 선생은 그마저도 허락할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손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문파 선생은 그때야 자신의 심중을 털어놓았다. “자고로 사람이 태어나 죽지 않은 사람이 없고 아무리 부강한 나라도 흥망성쇠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 집안이 삼백여 년간 부자로 살아왔지만 영생불망토록 이 부를 이어갈 수는 없는 거라” 잠깐 말을 끊은 문파 선생은 깊은 숨을 한 번 쉬시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조상님들의 부와 명예를 흔적이나마 이어가려면 공익재단을 만들고 대학을 세우는 게 젤로 옳은 길이지 싶다. 그라믄 대학이 존재하는 동안이라도 그 뜻이 오래 보존되지 않겠느냐!”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최염 선생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상하게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울림으로 내 가슴에 젖어 들었어요. 그것이 할아버지의 평소 뜻이셨음을 모를 리가 없지요. 더구나 할아버지의 표정에서 어느 때보다 강한 의지를 읽은 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욕심을 버리기로 작정했어요. 그게 옳은 일이었고 나의 최선이었어요!” 최염 선생도 앙연히 할아버지 문파 선생께 대답했다. “할아버지, 저는 할아버지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지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라이 할아버지 좋으실 대로 처분하십시오” 짧은 침묵이 문파 선생과 최염 선생 사이를 타고 흘렀다. 이윽고 문파 선생의 긴 한숨과 함께 다정한, 그러나 다소의 물기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 나왔다. “염아, 내, 니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고맙다” 마지막 경주최부자는 문파 선생 아닌 최염 선생, 할아버지 숭고한 뜻을 온전히 지켜드린 효손 고맙다..., 고맙다..., 고맙다...!! 잠시 동안 환청처럼 들리는 문파 선생의 목소리였다. “어쩌면 내가 할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은 평생에 딱 한 번, 바로 그 순간뿐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오래도록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녔고 온갖 수발을 다 들어드렸지만 한 번도 내게 그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할아버지셨기에 ‘고맙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오히려 환청처럼 여겨졌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말씀 한마디만으로도 나는 마치 필생의 내 의무를 다한 것 같아 가슴이 환하게 밝아졌어요!” 그러면서 최염 선생은 ‘그 고맙다는 말씀은 수천억 원짜리 인사였다’며 허허 웃었다. 그 대화 이후 계림학숙뿐 아니라 최부자댁, 문파 선생의 재산 희사는 망설임이 없었다. 불과 두어 해 만에 최부자댁 재산들이 속속 계림학숙에 희사되었고 뒤에 계림학숙이 대구대학과 합병된 뒤에는 다시 대구대학에 모든 재산이 차곡차곡 희사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평소 문파선생은 선생 자신에게 해오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 최부자댁 집마저 대구대학의 재산으로 넘겼다. 그나마 땅만 넘기고 집은 후손들이 사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후손들을 내보내지 못 한다는 단서를 달아놓은 것이 유일한 상속책이었다. 이렇게 문파 선생은 백산무역 파산 이후 또다시 빈털터리, 마지막 경주 최부자가 된 것이다. 4년 넘게 최부자댁을 취재하고 최염 선생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이 대목만큼 감동적이었을 때가 없다. 문파 선생도 문파 선생이시지만 최염 선생의 할아버지에 지극한 효심과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진정한 애국애족의 마음이 문자 그대로 느껴진 때문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보통의 부자였다면 그래도 후손들을 위해 무엇인가 조금은 남겨주고 싶었을 것이다. 현대의 세계적 부호인 록펠러, 카네기, 빌 게이츠 같은 사람들도 자선과 기부를 위해 재단을 만들고 천문학적인 재산을 희사했지만 그래도 자식들에게 역시 일반인의 범주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유산을 남겼다. 그러나 문파 선생은 자신의 전재산을 깡그리 다 계림학숙과 대구대학에 희사했다. 그 목록에는 소유한 전체 전답, 산, 선산, 살고 있는 집의 땅까지였다. 더구나 문파 선생은 후손들을 위해서는 그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심지어 최염 선생조차도 유산을 물려 받지 않고 혼자서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글을 쓰면서 만약 최염 선생이 할아버지께 전재산을 대학에 기증하는 것을 반대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무례한 추측을 해보곤 했다. 아마 그랬다면 문파 선생께서 큰 갈등을 겪으셨을 것이다. 아들을 건너 뛰어 평생 자신을 모신 손자 아닌가. 그러나 다행히도 손자 최염 선생은 할아버지만큼 큰 인물이었고 할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진정한 마지막 경주최부자는 문파 선생님이 아니라 최염 선생님이라 믿는다. 최염 선생이야말로 숭고한 할아버지의 뜻을 지킨 효손(孝孫)이자 현대사의 가장 멋진 어른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