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간 대학을 세우겠다고 결심한 문파 선생은 그 결심을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 시작했다. 마침 이 무렵 경북에서 종합대학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들은 상당수 일제강점기 일본에 부역했던 대지주들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과를 씻으려는 목적으로 대학설립을 계획, 이를 위한 자금을 내놓은 다음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면 빈축을 살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을 대신할 사람을 찾아 대표로 내세우려 했는데 그 분이 바로 문파 선생이었던 것이다. 문파 선생은 ‘경주 최부자’라는 오랜 명성을 지닌 가문의 주손인데다 누구나 존경하는 독립운동가이면서 평소 교육에 뜻이 있음을 밝혀오던 터였으니 그들로서는 선생처럼 적합한 대표자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선생을 추대해 경북종합대학 기성회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대학설립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은 최염 선생의 각별한 소신에서 밝혀진 사실이다. 대구에 종합대학 설립논의 먼저 일어난 후 문파 선생을 추대 “대부분 사람들이 처음부터 할아버지께서 대구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으로 알고 있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실처럼 굳어져 있지만 실제 전개 과정은 이처럼 다르고 내 증언이 가장 정확합니다. 상식적으로는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구대학 설립을 주도하셨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이것은 할아버지의 뜻도 할아버지를 모시는 내 뜻도 아니기에 실제 진행과정을 밝혀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기성회 회장이 되신 선생은 그때부터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뛰었다. 선생은 우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대학 설립에는 자금이 넉넉해야 하는데 그 자금을 낼 사람들을 도처에서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선생의 모금 운동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전개되어 나갔다. ‘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십리 간다’는 속담이 있듯, 경상도 일원의 어지간한 부호치고 대대로 이어온 경주 최부자의 은덕을 입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관련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유지들이 선생의 자금 모금을 나 몰라라 할 턱이 없었다. 처음 대학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일제에 부역한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선생이 다시 권한 사람들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따지고 보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재산을 유지한 사람들은 친일파 아닌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일제에 맞서 싸운 사람, 일제의 협박과 회유가 싫거나 무서운 사람들은 일찌감치 국경을 넘어 간도나 연해주 등지로 망명했다. 반면 국내에 남은 권세가나 재력가들은 일제와 결탁하지 않고서는 배겨날 도리가 없었다. 처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후 항일하던 많은 지사들이 세월이 흐를수록 친일파로 돌아선 것은 그만큼 집요하게 회유하고 협박하고 괴로움을 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선생은 그런 사람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일제에 부역해 잘 먹고 잘 살았으니 해방된 조국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최소한 용서가 이루어질 것 아니냐는 것이 선생의 설득 논리였다. 그들 역시 대학설립에 참여함으로써 최소한의 면죄부를 받기 원해 거액의 자금을 냈다. 그중 한 명이 대구대학 발기인인 청도군수 출신 최항목 씨다. 그는 당시 1만원의 거금을 냈고 선생을 도와 실제로 대학설립의 실무를 전담했다. 그 역시 일제강점기 군수 출신이라는 이유로 뒤에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군수를 지내는 동안 실시된 강제징용을 부당하게 여겨 한 사람이라도 징용에서 빼기 위해 노력했고 군민들이 일제에 압박당하지 않도록 여러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일제의 폐정을 막아냈다는 증언들이 있다. 특히 대구지역에서 대규모 토지를 가지고 있던 지주들이 적극적으로 대학설립에 기부금을 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대구대학 설립 인가가 나기 한 해 전 10월 1일에 일어난 10·1 대구 사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역사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1946년 10월 1일에 일어난 ‘10월 대구항쟁’은 그 사건의 발생 경위나 파급 과정, 전체적인 시위 규모나 그와 관련한 피해 상황 등을 보면 광복 이후 가장 큰 자생적 노동운동이자 미군정에 대한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1946년 여름부터 대구 경북 지역에 콜레라가 심하게 번졌다. 지금이야 콜레라가 거의 사라진 전염병으로 알려졌고 발생한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대처할 수 있지만 당시의 콜레라는 걸리면 죽을 확률이 높은 매우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실제로 경주에서도 콜레라로 죽은 사람을 트럭에 싣고 가서 백률사 뒤에 있는 화장장에서 태웠는데 얼마나 시신이 많았던지 오히려 그 화장장이 과부하가 결려 불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런 끔찍한 콜레라가 대구지역에 번졌고 여기서만 무려 2000명이 넘는 콜레라 환자들이 속출해 이 지역을 공황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군정이 타 도시로 전염되는 것을 막겠다며 대구지역에 대해 봉쇄령을 내려버렸다. 대구를 통하는 모든 길이 미군과 경찰로 인해 바리케이드가 쳐졌다. 그 덕분에 콜레라가 다른 도시로 전염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대구시내는 엄청난 물자 고갈과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렸다. 콜레라에 걸려 죽기 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더 많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치료에 임하던 의사들마저 굶주릴 지경이었다. 그렇게 끔찍한 여름을 났으니 미군정에 대한 혐오감이 어느 지역보다 높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니 그해 9월 이후 조선 공산당이 시작한 전국 총파업에서 대구지역의 참여가 훨씬 적극적이었을 것도 뻔한 이치다. 수천 명의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대구부청에 모여들었다. 10월 대구항쟁, 콜레라로 시작된 저항이 일제 청산 운동으로 이때까지도 대구는 식량과 물자 조달이 원활하지 않고 미군정의 식량배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민심이 극도의 불만으로 차 있을 때였다. 여기에 친일 행정가들과 친일 경찰들이 식량을 빼돌린다는 루머가 파다해 정부에 대한 불신이 최고도에 이르고 있었다. 대구부청 앞은 파업에 참가한 노동자들과 쌀을 달라는 시민들이 모여들며 아수라장을 이루었다. 바로 이때,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관들이 총을 쏴 두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이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그 이튿날 분노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대구경찰서를 습격해 대구경찰서장이 스스로 무장해제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경찰에 대한 무장해제 과정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은 과격한 군중들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위기를 느낀 경찰들이 대응 사격을 시작하면서 다시 17명의 시위대가 죽는 불상사가 터진다. 연이은 시민들의 피살은 결국 미군정에 대한 반대의 불길로 타올랐고 전국적인 항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무렵 친일 행정가들과 친일 경찰의 득세, 이들의 파렴치한 준동에 대한 불만이 전국적으로 고조되던 시기라 진원지인 대구 경북은 몰론, 경남, 서울, 경기, 충청, 전라, 강원 할 것 없이 전국적으로 경찰서가 피습되고 이 과정에서의 유혈 사태가 만만치 않게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약 77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대구 경북지역에서만 민간인 73명,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 63명이 사망했고 수천 명의 노동자 시민들이 체포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친일 악덕 지주로 알려진 인물들이 피습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일이 벌어져서 미군정 이후 한숨을 돌리고 있던 친일 세력들을 다시 긴장하게 했다. 이 10월 대구항쟁은 생존권을 지키려는 노동자, 민중의 자발적인 항쟁이자 해방 이후 어물쩍 넘긴 일제 잔재 청산을 주장하는 자각 운동이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대구 경북지역 친일 지주들이 학교설립에 참여하게 된 것은 문파 선생의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일이었다.   친일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생각이 많았던 선생이었던 만큼 선생은 친일 지주들에게 이 기회에 악업을 씻을 기회를 주려 했다. 그래서였을까, 대구대학을 처음 설립했을 당시 가장 많은 재산을 기부한 사람 역시 대구의 부호로 알려진 정해붕 씨였다. 그 역시 일제강점기 친일한 사람으로 선생의 설득으로 거액의 재산을 기부했다. 물론 문파 선생 역시 많은 비용을 대고 대학설립 과정의 모든 경비를 떠안았다. 특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인, 그때까지 최부자댁 사랑채 서고에 엄중히 보관되어 오던 약 7200여권의 장서를 기증했다. 참고로 이 장서는 당시 보기 드문 귀한 귀중한 서책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책들로 인해 대구대학이 동양철학과를 개설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영남대학 도서관 내 ‘문파문고’라는 고문헌실에는 5000여권의 책들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국내 어느 대학보다 많은 고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2200여권은 대출을 빙자하여 사라진 것도 있었고 특히 6·25전쟁 통에 대거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 이외에도 선생의 뜻에 동참한 수백 명의 사람들이 대학설립에 돈을 보탰다. 그들 중에는 순수하게 교육열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예의 일제강점기 부역을 탕감받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대학설립을 계획한 선생은 1945년 10월에 일단의 사람들을 모은 다음 ‘종합대학 설립위원회’라는 것을 만들고 여러 사람의 추대로 회장 역할을 맡았다. 이 위원회는 뒤에 ‘경북종합대학기성회’로 확대되는데 역시 선생이 회장직을 맡았다. 이후부터 꾸준히 사람과 돈을 모아 지금의 영남의료원이 있는 대구 대명동에 대학 부지를 마련했고 대구고등학교 교사를 빌려 먼저 개교하고 1947년에 설립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목표했던 종합대학으로 출범하지는 못했고 단과대학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대학설립 당시에는 교사가 다 지어지지 않은 관계로 임시로 대구고 교사를 임차해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대구대학 설립자는 모두 5명으로 등재되었는데 그중 선생이 첫 번째로 등재되어 ‘필두설립자’로 불리게 되었다. 초대 이사장에는 가장 많은 토지를 기부하고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던 정해붕 씨가 추대되었다. 1947년 9월 22일, 영남대학의 연혁 제일 밑에 나와 있는 바로 그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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