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문파선생이 대구대학만 설립한 것으로 알고 있는 분들이 많다. 사실을 알고 보면 대구대학 이외에 또 하나의 대학을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계림학숙이다. 전문학교 과정으로 만든 계림학숙은 6·25 전란 시기에 만들어진 학교다. 대구대학이 문파선생을 비롯한 대구 경북지역 독지가들의 기부와 성원으로 만든 학교라면 계림학숙은 오로지 문파 선생 혼자만의 힘으로 세운 학교이고 그 학교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최부자댁 사랑채에서 처음 문을 열었기 때문에 그 의미는 더욱 깊다고 할 수 있다. 계림학숙을 세우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참봉 어른, 인자 대한민국이 큰일 나게 생겼심더!” 중로의 신사가 문파선생 앞에서 진지한 표정으로 장황하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신사의 표정만큼이나 문파선생의 얼굴도 상기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많은 학자들이 오갈 데가 없어진 거라요. 당대에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지금 거의 다 경주에 안 와 있습니까? 이 사람들 가마 놔두면 다 굶어죽고 말 겁니다” 급하지는 않지만 요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파 선생이다. 더 설명하려는 신사의 말을 잘랐다. “범부, 자꾸 말을 돌릴라 카지 말고, 내인테 머를 원하는지 똑바로 이야기해 보소!” 바로 쏘아오는 선생의 말에 신사가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학교를 하나 세워 주이소”   “학교를…?” 문파선생 역시 깊은 숨을 들이켰다. 영남일대에 학자나 예술가들이 피난해 있었고 휴전이 되고 나서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굶어죽을 위기였다 6·25가 일어나고 불과 4일 만에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했고 3개월 만에 경상도 일부와 부산 등지를 제외한 전국을 장악할 정도로 맹위를 떨쳤다.   그러다 그해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했고 인민군이 급거 철수하면서 피난 온 사람들의 숨통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란의 와중에 피난 가지 못한 남한의 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은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납북되는 등 불행을 겪었다. 바로 이런 시기에 남한의 학자나 예술가들 역시 모두 영남 일대로 피난해 있었고 휴전이 되고 나서도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경주 일원에 얹혀사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김범부(金凡父 본명 김정설(金鼎卨) 1897-1966) 선생은 이런 학자들이 어려움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문파 선생에게 대학을 하나 설립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김범부 선생은 당대 동양철학의 권위자로 소설가 동리 김시종 선생의 친형이 되는 사람이다. 김동리 선생이 소설로 위명을 떨치기 전에는 김범부 선생이 훨씬 유명세를 타고 있기도 했다. 여하간 김범부 선생의 부탁을 받은 문파 선생은 그 즉시 대학설립에 박차를 가하고 1955년에 문파교육재단을 설립, 지금의 최부자댁 본가를 중심으로 계림학숙을 설립했다.   이 계림학숙의 재원에는 과수원 약 1만 평, 대지 약 1만1500평, 전답 약 1만3000평, 임야 약 1만평, 산림 276정보 등이 들어갔는데 이 모든 내역이 오로지 문파 선생-최부자댁의 희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계림학숙은 나라가 안정을 되찾으면서 교수들이 하나둘 자신들의 원래 터전인 서울이나 다른 지방으로 돌아가면서 발전적으로 해체했고 1959년 대구대학재단과 합병하여 대구여자학숙으로 개교했다가 1962년에는 대구여자초급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물론 이 학교 역시 영남대학교에 합병되어 나중에는 영남이공대의 전신이 된다. 계림학숙은 오로지 최부자댁 재산만으로 세운 의미 깊은 대학, 어려운 학계, 가문의 감로수 같아 이 학교는 비록 도중에 합병되고 말았지만 문파 선생이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만든 대학이란 점, 경주에서 최초로 만든 대학이라는 점 등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실제로 더 큰 의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전란 중에 만들어진 학교라는 점이다. 위의 대화에서도 보듯이 문파 선생은 오로지 학자들을 구제하고 지원하기 위해 계림학숙을 세웠다. 전쟁의 와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었고 그것은 교수나 학자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더구나 대학들이 모두 부산으로 피난 가서 겨우 간판만 걸고 학교를 열었을 뿐 교수들에게 급여조차 줄 수 없어서 이들 역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러니 문파 선생이 학숙을 세우고 정식으로 급여를 주며 교수들을 채용한 것은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에 감로수를 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학교를 열어놓기는 했지만 마땅한 강의실이 없었다. 결국 최부자댁 사랑채와 행랑채 등에서 강의를 열었고 그래도 강의실이 모자라서 집과 이웃한 향교를 빌려 강의실로 사용했다. 이때 예의 김범부 선생은 초대학장을 지내면서 사랑채 한쪽에 책상과 의자를 두고는 교수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고 학교의 재정이나 운영 관련 업무를 보기도 했다. 계림학숙이 또 하나 의미가 있는 것은 교수들이 전쟁이 끝남과 함께 거의 대부분이 원래 자신들이 봉직하던 대학교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계림학숙 교수들은 그 어렵던 시절 문파선생의 용단으로 3~4년 남짓 버텨냈는데 정작 전쟁이 끝나자 자연스럽게 원래 자신들이 근무하던 학교로 되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에 대해 문파 선생은 단 한 명의 교수도 부당하다며 억지로 붙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억지로 붙든다고 붙들려 있지도 않겠거니와 명망 있는 교수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마음껏 후진을 양성할 수 있도록 배려한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의미가 바로 이 계림학숙에 있으니 그것은 계림학숙을 만드는 것으로 최부자댁 전재산이 마침내 최부자댁과 완전한 고별했다는 것이다. 대구대학 설립 때의 이야기에서 보듯, 문파선생은 대구대학을 설립할 당시에는 전재산을 내놓지 않았다.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비용을 대고 설립 요건을 갖추기 위해 7000여권의 장서를 기증했지만 아직도 최부자댁 재산은 대부분 문파 선생의 명의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바로 이 계림학숙을 설립할 때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문파 선생이 가진 재산만 가지고 학교를 설립했음은 물론 학교 설립 후에 남은 재산 역시 전부 이 학교에 희사한 것이다. 최염 선생은 문파 선생이 마지막 재산을 정리해 계림학숙을 세울 때를 기억하며 한 사건을 떠올렸다. 학교를 설립하고 한 해쯤 지난 어느 날, 문파 선생이 최염 선생을 붙들어 앉혔다. “염아, 니는 우리집 재산이 어떻게 쓰이기를 바라노?” 최염 선생은 갑자기 묻는 말씀에 어리둥절하여 할아버지를 쳐다볼 뿐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맡아 있던 이 재산을 우짜믄 깨끗하게 다 쓸 수 있겠노 말이다!” 최염 선생은 문득,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평소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일을 드디어 실천하시려는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할아버지는 당신이 물려받고 더 크게 일군 우리 집안의 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내심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하셨어요.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그 첫 번째 이유는 아버지에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한량으로 사신 분이어서 할아버지가 가계를 물리기 곤란하다 여기셨지요.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방에 머물면서 할아버지의 오랜 훈육을 받게 된 것도 실상은 그런 이유였어요” 사실 이 대목은 최염 선생이 매우 조심스럽게 회고한 내용이다. 그도 그럴 것이 효를 중시하는 유학을 마지막으로 익히고 체험한 최염 선생이기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섣불리 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문파 선생의 장남이자 최염 선생의 아버지인 최식 선생은 문파 선생과 달리 일제 강점기 전반을 통해 단 한 번도 자유롭게 살지 못하신 분이었다. 최염 선생의 회고에 따르면 최식 선생 역시 어린 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의 삶은 비교적 건실하고 모범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최식은 예의바르고 부지런한 학생이었고 특히 머리도 좋아 영남일대에서는 가장 똑똑한 수제들이 들어간다는 대구고보에 당당히 합격한 수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파 선생이 일제 강점기 이전의 부잣집 도련님으로서 비교적 자유롭게 신문물을 체험하며 당신만의 올곧은 자유의지로 사신 것과 달리 최식 선생의 경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신의 뜻을 펴볼 기회가 없었다. 또 국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젊은 엘리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것이 지극히 한정적이었다. 뛰어난 두뇌로 공부를 해봐야 기껏 일제 치하에서 관리나 될 수밖에 없었고 마음을 독하게 다지고 독립운동을 하려니 목숨을 보전하기 쉽지 않아 선뜻 나설 일도 못 되었다. 게다가 소문난 부잣집의 주손이라는 부담감은 평생동안 최식 선생의 어깨를 짓눌러 어딜 가나 늘 자유롭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더구나 문파 선생이 독립운동에 매진하는 동안에는 가족들조차도 그 사실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신중하고 비밀스럽게 했기에 최식 선생조차도 한때는 문파 선생이 친일한다고 오해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최염 선생님으로부터 아버지 최식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일제강점기 학자나 예술인들의 암울했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국운이 절단난 상황에서 머리에 지식은 들었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할 수 있었던 가장 손쉬운 일은 어쩌면 한량 노릇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그 시대 유명한 문인들이 대거 속출하고 그들이 파격적인 기행을 일삼으며 주색잡기에 빠진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망한 나라에서 제 뜻을 펼칠 수는 없고 결연히 혁명을 일으킬 수 없었던 암울한 회색지대의 수제들은 술과 담배, 여자에 천착하며 스스로의 삶을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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