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학은 이후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록 명색은 단과대학이긴 했지만 서울의 어느 대학보다 좋은 대우로 우수한 교수진을 초빙해서 강의하고 있었고 우수한 학생들도 많았다. 대구·경북 일원에서는 가장 많은 학과를 보유하고 있었고 학생 수도 가장 많았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대로 1946년 9월에 각각 문을 연 대구사범학교, 대구의과전문, 대구농림 등 국립대학들이 국대안 후인 1951년 10월, 국립경북대학으로 통합되고 법정대학과 문리과대학을 새로 추가하여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구대학의 위상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당시에는 대학이건 고등학교건 국립이나 공립을 더 알아주는 풍토였다. 상대적으로 등록금이 싸고 교수진들 구성에도 사학에 비해 원칙적이라는 평가들이 있어서였다. 그런 풍토에서 대구대학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문파 선생의 교육관이 투철했고 대학에 대한 투자가 다른 대학에 비해 남달랐기 때문이다. ‘60세 넘은 모든 교수들의 사직서를 받아라’ 혁명정부로부터 받은 최초의 압력 1호였다. 그러나 이런 안정적인 기류는 5·16군사 쿠데타와 이후 이어진 군사정부의 시작과 더불어 한 번 더 큰 풍파를 맞게 된다. 당시 최염 선생은 한때 국가재정을 감시 감독하는 심계원에서 근무하다가 4·19와 5·16을 거칠 무렵에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대구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하며 학교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 무렵에는 대구중학교를 임차하여 대학을 운영하고 있을 때였다. 문파 선생은 앞에서 말했다시피 대학이 평온할 때는 이사로만 있으면서 경주 본가에서 최염 선생을 통해 학교 소식만 듣곤 했다. 물론 최염 선생 역시도 학교 살림살이에만 신경을 썼을 뿐 교수임용이니 학생 관리 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간섭하지 않았다고 한다. 급변하던 사회기류와 달리 대구대학 자체는 안정적인 모습으로 순탄하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당시 대구대학은 대구중학교 건물을 빌려 운영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는 대구시 대명동에, 지금은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부지가 된 곳에, 몇 만 평의 땅을 사두고 미국으로부터 목재를 원조받아 단층짜리 건물을 완성해서 처음으로 셋방살이를 면해 있기도 했다. 비록 대규모 공사를 일으킬 만큼의 비용은 없었지만 안정적으로 운영할 때였다. 그러나 쿠데타 주체들이 정치 일선에 나서면서부터 학교 상황이 180도로 변해버렸다. 5·16 이후 구성된 국가재건최고위원회는 가장 먼저 대학을 지배하고 뜻대로 움직이는 어용조직을 만드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대학을 통제의 첫 시작점으로 잡은 것은 몇 가지 이유에서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국가의 최고 지식인들이자 엘리트여서 대중을 이끄는 주도적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4·19 이후 대학생들의 위상은 훨씬 높아져 독재에 맞서거나 사회개혁을 외치는 첫 단추가 모두 대학에서 시작되었다. 게다가 1960년 4월 말 기준으로 약 10만 명이던 고등교육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1961년 5월 기준 14만명이 되어 있었다. 국가에 반대할 개연성 있는 인구가 늘었다는 것은 어쨌거나 정권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군사정부는 대학만 틀어쥐면 여론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대학을 통제해야 할 제1의 정적(政敵)으로 규정한 군사정부의 어두운 장막은 새 문교부 장관에 야전복에 권총까지 찬 문희석 대령이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60세 넘은 모든 교수들의 사직서를 받아라’ 혁명정부로부터 문파 선생이 받은 최초의 구체적인 압력 1호였다. 학자의 경륜이나 덕망, 오랜 기간 축적된 학식 등이 철저히 무시된 이 어처구니없는 지침은 전국의 대학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60세 이상 교수들을 내보내라니, 아닌 밤중에 홍두께 맞은 대학들이 뜻밖의 지침에 어리둥절해한 것도 잠시였다. 혁명정부는 가장 먼저 이화여자대학교 김활란 총장의 사직서를 본보기로 받아냈다. 이어 중앙대학교 임영신 총장의 사표도 벼락치기로 받아냈다. 시퍼런 혁명정부의 칼날이 사정없이 휘둘러지자 누구도 감히 대적조차 하지 못 한 채 목이 잘려 나갔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김활란 교수는 사직서는 냈지만 총장직은 계속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사독재가 여성계에 영향력이 큰 김활란 교수를 차마 몰아낼 수 없어서 한 편으로는 김활란 교수를 몰아낸 듯이 꾸미고 한편에서는 적당히 눈을 감아 준 것이다. 대구대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장 60세 넘은 이우창 학장이 ‘처리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문파선생은 이 조치가 말도 안 된다고 믿고 직접 문희석 장관과 담판을 지으려 했다. 마침 문교부에서 대구대학 이사장에게 문교부에 출두하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문파 선생의 말을 들을 리 만무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우창 학장은 ‘자진사퇴’ 형식으로 학교를 떠났지만 문파 선생은 단 한 번도 이 학장에게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고 끝까지 지키려는 노력 역시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권력 앞에서 대학 따위는 하잘것없는 존재였다. 군사정권의 대학정비령 꿩도 토끼도 놓치고 대학에 상처만 남긴 채 62년에 폐지 이전부터 군사정부는 ‘대학입학자격 국가고시제(61년 7월7일)’를 발표하여 대학에 들어가려면 국가에서 치는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안을 발표했다. 이어 8월에는 ‘국공립대학 2차 정비안’을 발표하더니 마침내 9월 1일에는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법률 제708호)’을 제정, 공고했다. 위에서 말한 60세 이상 교수 면직은 교원의 정년을 60세로 정한 이때의 규정에 의한 것이었다. 그해 10월에는 ‘학사자격고시령’이 공포되었고 그해 처음으로 학사고시제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뒤에 이른바 예비고사 제도가 되었고 후의 학력고사, 그리고 지금의 수학능력시험의 원형이 되었다. 결국 대학의 자율적 신입생 선발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최초의 법령인 셈이다. 또 그해 11월 18일에는 ‘사립대학 정비안’이 발표되었다. 이 안의 골자는 학생 정원이 서울 700명, 지방 600명 이하인 학교를 폐지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전국 37개 주간 사립대학 중 대구에 있던 청구대를 위시하여, 관동대, 국민대, 국학대, 단국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동양의대(현 경희대 한의대학), 마산대, 원광대, 한국사회사업대(현 대구대), 홍익대 등 12개 대학이 문을 닫았고, 25개 대학만 남게 되었다. 여기까지도 대구대학은 그런대로 버텨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9일에 발표한 ‘대학정비령’은 대구대학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립대학을 옥죄어 재정적 위기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이 안에는 뒤에 개정을 거치면서 학교의 건물 평수, 도서 보유량, 자연계와 인문계의 비율, 전체 대학생 정원의 감축 등 세부적인 조건까지 엄하게 적용해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사립대학들을 매우 힘들게 쥐어짰다. 특히 대구대학은 문파 선생의 재정적 여력이 더 이상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깊은 고민을 안겼다. 당시 선생은 이미 집안의 전 재산을 대구대학에 희사하고 난 뒤여서 추가적인 지원을 할 방도가 없었다.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그 무렵에는 학교를 위해 후원을 자처하는 독지가들도 나오지 않았고 공연히 대학 일에 관여했다가 군사정부의 눈 밖에 날 것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에 반해 서울의 상당수 사립대학들은 예의 ‘우골탑’으로 다져놓은 든든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쉽게 대학 정비령의 요건을 맞추어 낼 수 있었다. “오죽 그때의 상황이 답답했으면 누군가 할아버지께 ‘전쟁 통에 우리도 돈을 좀 모아 놨어야 했다’고 푸념했다가 혼쭐이 난 적도 있었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폐지되어 1962년 이후에는 폐지된 대학들이 다시 회생하는 곡절을 겪었다. 이 제도가 흐지부지된 것은 당초 군사정부가 대학 관계자의 조언을 듣거나 여론수렴의 과정 없이 단시일에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으로 법안을 집행했기 때문에 군사정부에 대한 대학들의 불만과 사회적 여론이 지나치게 나빠졌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대학의 감소는 고등학교 졸업생의 진학 기회를 대폭 축소하여 학생과 학부모의 반발을 샀고 대학 입장에서는 운영난을 가중시켜 교원의 대량 해고 사태를 유발하는 등 다방면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대학정비령은 군사정부가 겉으로 내세운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과 대학의 지방 분산’이라는 거창한 목표를 실현할 수도 없었고 대학을 장악해 여론을 몰고 가겠다는 저의(底意)마저 물거품을 만든 채 대학가에 깊은 상처만 남긴 악수가 되고 만 셈이었다. 한편 이때부터 문파 선생은 보다 장기적인 발전, 특히 대구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대학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면 아무 조건 없이 대학을 넘겨주겠다는 또 다른 결심을 하기 시작했고 심중으로 그런 사람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이런 뜻을 세운 것은 재정상 학교운영이 어려워서인 것으로 잘 못 알려져 있어요. 그러나 대구대학은 그런대로 건전한 재정상태였고 다만 종합대학으로 발전하거나 적어도 어떤 외압에 견딜 만큼 안정적인 재정상태를 유지하기를 바라셔서 다른 운영자를 물색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나 문파 선생의 이런 생각으로 인해 또 다른 돌이킬 수 없는 풍파가 대구대학을 향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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