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 제대로 된 대학이 생겼다는 소식, 더군다나 그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경주최부자라는 소식이 삽시간에 대구·경북 전역에 퍼져 나가자 신입생이 쉽게 모집되었다. 많은 독지가들의 기부로 학교 재정도 양호했다. 이대로 가면 대구대학은 별 탈 없이 문파선생이 꿈꾼 ‘국가를 운영할 인재를 키우고 세계적 학자를 만들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러하듯 대구대학 역시 순탄치 않은 몇 차례의 고난을 겪게 된다.
그 첫 번째가 정부의 ‘농지개혁’으로 인한 재정의 악화와 그에 따른 경영난이었다. 농지개혁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한 바 있다. 5년 기한을 두고 농지를 소작인 명의로 넘기는 것이다. 토지 소유자는 5년간 소작료 대신 정부에서 지가증권을 받았다는 것도 말했다.
대구대학의 위기는 바로 이 제도에 있었다. 자본금 1000만원과 전체 98만5000평의 토지를 자산으로 시작한 대구대학인데 이 토지 중 상당수가 농지였다. 이전에는 농지에서 나오는 비용만으로도 학교 운영이 되었으나 지가증권 발행으로 농지에서 나오는 소득이 사라지자 학교 재정이 급격히 나빠진 것이다. 더구나 농지가 모두 소작인들에게 분배되고 나자 대구대학 재정은 극도로 나빠졌다.
최부자댁 지가증권으로 대구인쇄소, 대구대학 지가증권으로는 경북여객 인수
이것은 최부자댁도 마찬가지였다. 문파 선생은 고심 끝에 지가증권을 적산기업(敵産企業) 인수에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적당한 기업을 물색한 끝에 ‘대구인쇄합자회사’를 인수했다. 인쇄회사를 인수한 것은 최부자댁에서 제지소를 가지고 있었던 것과도 관계 있었지만 모든 지식산업을 인쇄가 뒷받침한다는 것을 간파한 결과였다. 참고로 이 인쇄소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인쇄소로 당시로는 첨단기술인 석판인쇄를 하는 곳이었다.
한편 대구대학에 속한 농지에서 나오는 지가증권으로는 ‘경북여객자동차주식회사’를 인수했다. 당시 경북여객은 모두 300여대의 버스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경북여객은 겉모양만 그럴싸했을 뿐 좀체 수익이 나지 않아 나중에는 문파선생이 직접 경영에까지 참여하는 어려움을 주었다. 그 이유는 첫째, 버스 운전사와 차장(우리나라 버스는 70년대까지 차장 제도가 있었다)이 짜고 ‘삥땅’, 즉 운임을 착복하는 일이 잦아서였다. 둘째, 일본인 기술자들이 해방 후 일본으로 도망간 탓에 차가 고장 났을 때 제대로 수리할 줄 아는 기술자가 없어서 제때 운행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일제시대에는 안정적인 수익을 올렸던 여객회사가 대구대학이 인수한 뒤로는 겨우 적자를 면할 정도였다.
이 경북여객은 꼼꼼히 운전사를 관리하고 기술자들이 조금씩 수리 기술을 알아가면서 자리를 잡아갔지만 뜻밖의 대사건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 사건이란 바로 6·25전쟁이다. 전쟁이 터지자 모든 버스가 징발되어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었다. 징발된 버스는 뒤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뒤 차를 지입제로 바꾸었는데 이렇게 되니 수익성이 더 나빠졌다.
다행히 선생이 개인적으로 인수한 인쇄회사는 꽤 수익이 났다. 천만다행으로 대구는 전쟁을 피해갈 수 있어서 인쇄 시설이 그대로 있었고 숙련된 기술자들도 있어 운영에 큰 차질이 없었다. 게다가 그 시대에는 모든 교육·홍보물이 종이로만 제작되던 때라 인쇄회사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특히 이 인쇄소는 전쟁으로 인해 오히려 활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전쟁 중에 활황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6·25가 나고 이승만 정권을 따라 내무부와 국방부가 대구로 왔는데 국방부는 대통령을 따라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국방부 군인들이 대구인쇄소에 와서 ‘육군본부고급부관실발간과’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시기 국방부 장관이 신성모 씨였다. 신성모 씨는 다름 아닌 독립운동 당시 문파 선생의 아우 최완 선생 집에 숨어 있었고 최완 선생과 문파 선생으로부터 거액의 도피 자금을 받아 해외로 나갔던 사람이다.
여하간 국방부에서 간판을 달았으니 이것은 징발이었다. 비록 정부는 피난 왔지만 전쟁은 치러야 했다. 그러려면 전선에 있는 우리 군에는 사기를 심어주고 적군에게는 위협을 주기 위해 삐라(선전용 전단)를 찍어야 했다. 그걸 찍기 위해 신성모 씨가 문파 선생께 부탁했다. 다른 인쇄소 같았으면 대충 인쇄소를 징발해서 찍으라고 하면 무조건 찍어야 했겠지만 신성모 장관은 오히려 문파선생에게 특혜를 준 것이다. 심지어 삐라 제작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때 문파 선생의 사촌 동생을 국방부 문관으로 취직시키기도 했다. 이때 찍은 삐라가 매일 수만 장이었으니 전쟁통에 오히려 돈벌이가 된 것이다.
이렇게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인쇄소가 유지된 덕분에 뜻하지 않는 과외의 일도 생겼다. 학술서적을 전문적으로 출판하는 ‘탐구당’이라는 출판사가 있었다. 그 사장이 지금 좌파적 현대한국사 학자로 알려진 성공회대학교 한홍구 교수의 아버지인 한만년(韓萬年) 씨였다. 그분이 대구인쇄소에 와서 공장의 한 모퉁이라도 좋으니 사무실을 꾸릴 공간을 빌려달라고 사정했다. 문파선생은 어려운 시기에 그 정도쯤 도와주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며 선뜻 자리를 내주었다. 뒤에 그 출판사에서 비중 있는 책을 펴내면서 출판사 위상이 높아졌는데 덕분에 인쇄소의 이미지도 올라갔고 매출에도 도움이 되었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6.25 후 ‘국민방위군’이란 것이 창설되었는데 그 사령관이 김윤근이란 장군이었다. 이 김윤근 사령관이 정치를 할 요량이었던지 대구인쇄소에서 주문해 자서전 수십만 부를 주문해서 찍어 놓았다. 이상한 것은 개인의 자서전인데 결재는 방위군 사령부에서 한 것이었다. 공교롭게 책을 다 찍고 났을 때는 김윤근이 군사재판에 회부되는 바람에 책은 한 권도 배포되지 못했고 결국 트럭을 동원해 버려야 했다. 개인의 자서전을 방위군의 비용으로 찍은 것만 해도 끔찍한 비리이지만 모두가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일어난 일이어서 더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잠시 이 국민방위군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넘어가자. 국민방위군은 1950년 12월 21일 공포 실시된 ‘국민방위군 설치법’에 의해 생긴 제2국민병이다. 국민방위군은 중공의 개입과 인해전술에 맞서기 위해 이승만이 ‘국민총동령’을 내리면서 급조된 부대였다. 군·경과 공무원을 제외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군에 안 간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들로 만든 보충 부대로 그 수가 50만에 육박하는 대부대였다.
그런데 이 국민방위군의 부정부패가 극심해 군량을 지급하지 않고 피복조차 지급하지 않아 얼어 죽고 굶어 죽는 군이 5만~9만을 넘겼다. 비리액도 무려 50~60억원, 지금의 가치로 수천억원에 해당하는 거금이었다.
5~9만 국민방위군 굶어죽고 얼어죽어, 신성모 국방장관 해임, 김윤근 사령관 등 5명 공개처형
이 부대는 지휘도 정규군에서 맡은 것이 아니고 이승만의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대한청년단’ 간부들이 맡았다. 신성모, 유진산, 장택상, 지청천 등 유명 인사들이 최고위원을 맡았으나 이들은 이름뿐, 실제로는 깡패나 다름없는 대한청년단 수뇌부가 갑자기 장군이니 장교의 계급장을 달고 그 지휘를 맡았다. 총사령관 김윤근만 해도 군대 경험이 전혀 없는 대한청년단의 간부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준장이라는 계급을 달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국가의 안보보다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했던 간부들은 군인들에게 지급해야 할 군량을 속여 극소량만 지급했고 심지어는 피복 대신 두 사람당 한 장꼴로 가마니를 나눠주는 등 개나 돼지 부리듯 국민방위군을 홀대했다.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떠는 것도 모자라 가마니에서 생긴 ‘이’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했다. 이러니 몇만 명의 군인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황천길로 가버린 것이다.
이 사실이 연일 신문지상에 도배되어도 이승만은 억지 해명을 해대기에 급급했고 국방부는 신성모 장관이 직접 나서서 이 비극을 은폐하고 조작했다. 우습게도 신성모 장관은 국민방위군에 대한 폭로 기사를 ‘제오열의 책동’이라고 규정하며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현대사에서 정부 시책에 제동을 걸면 누구나 간첩 혹은 좌익,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전례가 이 국민방위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 심지어 비리를 덮기 위한 비리까지 속속 드러났다. 이때 여론이 얼마나 나쁘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컸던지 이승만은 2인자라 불리던 신성모 장관을 해임하고 김윤근 등 군 수뇌부 5명을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처형하면서 꼬리 자르기에 급급했다.
여하간 이런 인연 덕분에 인쇄소는 활황을 유지했다. 그 덕분에 대학 운영이 한창 어려울 무렵 교수와 교직원들이 학교에서 월급을 타가는 것이 아니고 이 대구인쇄회사에 와서 월급을 받아 가는 진풍경이 월급날마다 되풀이되었다. 아마 대구대학이 전쟁 중에 안정적으로 급여를 받아 가는 유일한 대학이었을 것이다. 이 당시를 회고한 최염 선생의 회고!
“당시의 지폐는 고액권이 귀해 월급으로 받는 돈이 한 보따리나 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제가 인쇄회사에서 경리 일을 도운 적이 있었는데 월급날이 되면 교수들이 자전거를 타고 인쇄회사로 와서 한 보따리나 되는 돈을 받아 갔어요. 제가 직접 돈뭉치를 자전거 짐받이에 실어준 적도 있었어요. 유명한 백남억 교수도 그중 한 분이었는데 이분 역시 자전거를 타고 와서 돈다발 짐을 받아 가시곤 했어요”
이 사실만 봐도 그 인쇄회사가 대학존립에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지 알 수 있고 문파선생이 인쇄회사를 경영하면서도 개인적으로 돈을 모으는 것보다 학교가 제대로 운영되는 데만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