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대학의 두 번째 위기는 6·25전쟁 중에 문교부가 시행한 국립종합대학안(국대편입안)이었다. ‘국대편입안’이란 각 도마다 종합대학을 신설하거나 지방에 있는 단과대학을 합쳐 국가가 운영하는 종합대학으로 육성한다는 문교부의 계획안이었다.
그 무렵 대구에는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 있었고 2개의 단과대학과 대구사범학교, 대구의학전문, 대구농림학교 등이 있었다. 이 학교 중 청구대학은 야간학교라 국대안에서 빠지고 나머지 학교들을 모두 국립대학이란 이름 아래 편입시켜 국립종합대학을 만든다는 안이 세워졌다. 여기에 대구대학을 넣으면 문리과 대학, 법정 대학 등 구색이 맞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교부가 일방적으로 세운 안일 뿐이었다. 민립대학을 세우고 나름대로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혼신을 다하던 문파 선생은 정부가 주도하는 국립종합대학안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더구나 그 무렵의 정부는 전쟁 와중에 제 역할을 하기도 힘들 때고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비상 상황에서 이런 번거로운 안을 내어 대학을 통폐합할 이유가 없다고 믿은 것이다. 뒤에 문파 선생을 도와 학교 운영에 적극 참여했던 최염 선생은 할아버지의 당시 생각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 당시 할아버지는 외국의 유명 민립대학을 모범적인 예로 들고 국립대학이 있으면 반드시 민립대학이 있어야 하고, 훌륭하게 운영되는 민립대학은 오히려 국립대학을 능가한다는 말씀을 자주 하곤 하셨지요!”
대구대학을 굴복시키기 위한 키네마극장 운영권, 오히려 대구대학 재정에 보탬이 되는 아이러니...!
대구대학이 국대안 편입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몸이 단 문교부가 편입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대구에 있던 ‘키네마극장’ 운영권을 대구대학에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키네마극장 역시 적산기업으로 일제강점기에는 ‘키네마 구락부’라 불리던 대구의 유명한 영화관이었다.
이렇게 조건을 걸자 일부 재단 이사들이 중심이 되어 1951년 2월 국대편입안을 의결해버렸다. 공교롭게 당시 문파 선생은 대학이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에서 이사장직을 내놓고 경주에서 생활할 때였다. 누구보다 학교를 사랑하고 학교의 발전을 도모하는 선생이었지만 자신이 학교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 또한 매우 경계했기에 이렇게 학교를 떠나 있었던 일이 간혹 있었던 것이다.
이사들의 생각으로는 키네마극장을 인수하면 학교에 수입원이 생기는 것이니 당연히 좋아했던 것인데 이를 안 문파 선생은 펄쩍 뛰었다. 대학이 편입되어 버리면 대학에 속한 키네마도 자연스럽게 국립대학의 운영자인 정부로 넘어가 버리는데 이사들이 이 단순한 사실을 간과했던 것이다. 선생은 다시 이사장직에 오른 다음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교수들과 학생들과 함께 국대안 반대에 나섰는데 결과적으로 이때의 반대는 학교를 건져내는 아주 중요한 계기였다.
결국 선생은 그해 12월에 있은 이사회에서 국대편입안을 취소해 버리는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이로 인해 문교부는 대구대학을 눈엣가시로 여기게 되었고 대구대학을 압박할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키네마극장인데, 얼떨결에 대구대학으로 운영권이 넘어온 키네마극장은 그 후에도 한동안이나 대구대학이 운영하게 되어서 당시 문교부의 주먹구구식 행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가 되고 말았다. 키네마극장을 미끼로 대구대학을 편입시키려 했던 문교부가 문파 선생의 기지로 인해 키네마극장만 대구대학에 기증한 꼴이 되어버린 셈이다. 문교부 속이 성할 턱 없었다.
그러나 문교부라고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었다. 문교부는 국가권력을 발동해 하나둘 대구대학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52년 대구대학에 법학과에 모집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를 신문 등으로 알려버렸다. 또 대구대학 재학생들에 대해 병력 보류 혜택도 안 준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1000여명의 학생 중 7~800명이 경북대로 가버렸다. 방송 언론은 이 중지령을 보도하면서 마치 학교가 금방이라도 문을 닫을 것처럼 떠들었다. 결국 이로 인해 그해 신입생 모집이 상당 부분 좌절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대구대학 경영이 어려워져 앞 장에서 말한 대로 인쇄소에서 월급을 주는 일이 생겼다.
문교부의 비겁한 꼼수... 대구대학 허가취소 공지, 대구대학 학생들에게는 병력특례도 안 줘...!
여기에 그치지 않고 문교부는 그해 5월에는 ‘대구대학의 허가를 취소한다’는 공문을 또 다시 전해 왔다. 돈 한 푼 대지 않은 정부가 독지가들이 십시일반으로 설립한 대학을 해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올바르지 못한 국가권력이 민간의 정당성 따위를 짓이기는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법이었다. 이 당시 문교부 장관이 백낙준 씨였고 차관이 경북대학교 총장으로 내정되어 있던 고병관 씨였다. 이들은 대구대학이 사립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멋대로 대학허가를 취소하는데 앞장선 장본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때도 선생은 국대안 반대 후 다시 한 명의 재단 이사로 있으면서 학교에는 관여하지 않고 경주에서 유유자적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폐교령이 있고 나자 앙연히 학교로 돌아가 이사들의 잘못을 깨우치고 재단이사장 자리를 다시 맡음과 동시에 문교부의 압박으로 공석이 되어버린 학장까지 겸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생은 스스로 학장이 될 만한 지식이나 합당한 학위가 없음을 내세워 과도기적 자리인 ‘학장서리’를 자임했다. 그런 다음 문교부에 대구대학 존속의 필요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당연히 문교부가 그 진정서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최염 선생은 이 일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것 같았다고 했는데 오래전의 일이라 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확인할 길이 없었다.
참고로 문파 선생은 대구대학이 영남대학으로 합병되기 이전 20여 년간 모두 네 번 재단이사장에 취임한 바 있고 한 번 학장서리 역을 맡았다. 그러나 개인의 사리사욕 때문에 그 자리를 맡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대구대학이 아주 나쁜 상황에 빠져 있을 때나 어려운 일에 봉착할 때는 기꺼이 해결사 역할을 맡으셨고 그 사안이 정상화되면 다시 한 명의 이사로 돌아가 일선에서 후퇴해 계셨어요. 그런 할아버지가 학장서리까지 자임하고 나섰으니 정부 역시 바짝 긴장되었을 것이고 어떻게든 할아버지와의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면에 나선 할아버지 역시 건곤일척의 긴장 속에서 신중한 대응을 모색해 나가셨지요!”
보통 정부와 민간이 싸우면 민간이 제대로 힘조차 못 쓰고 두들겨 맞고 물러서기 마련이다. 더구나 그때는 관(官)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을 때였다. 그 힘은 300년 누대에 걸쳐 인심을 쌓고 덕망을 이어온 최부자 가문이라고 해서 이기거나 누를 수 없었다. 제도를 장악하고 권력을 거머쥔 정부는 자기들 멋대로 법을 만들기도 하고 아예 법을 능가하는 존재로 군림했다. 그에 대항하는 문파 선생과 대구대학은 바람 앞의 등불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무리 힘없는 민간이라고 해도 그 민간이 정당하고 흔들리지 않을 때 그런 민간을 상대하는 정부는 언제나 사악하고 비겁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오랜 역사의 반증이다.
그 당시의 문교부 역시 대구대학 해체의 합당한 명분을 찾아내지 못한 채 비열한 꼼수를 꺼내 들었다.
‘대구대학 학생들에게는 ‘병력특례’를 주지 않겠다. 단, 경북대학으로 학적을 변경할 경우 병력 특례를 부여한다’
이 발표는 그때까지 흔들림 없이 문교부와 싸우던 재단이사들과 교수, 학생들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특히 학생들에게는 ‘직격탄’이라고 할 만큼 살벌한 조치였다. 병력특례란 대학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징집을 유보해 주는 제도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이 병력특례를 대학 다닐 동안에는 전쟁이 나도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다고 해석했으니 이만큼 매력적인 혜택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 전쟁이 한창인 때고 전선에서는 매일 수천 명씩 군인이 죽어갈 때였다. 전쟁터에 끌려가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벌한 시대 아니었나? 이쯤되면 대구대학에 남아 있겠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정도였다. 바보가 아니면 모두 정부, 문교부가 주도하는 경북대학으로 옮길 것이 뻔했다.
“아마 이때가 대구대학이 가장 어려울 때였을 겁니다. 대학의 명운이 여기에 모두 걸려 있다시피 했지요. 더구나 대구대학이 많은 분들의 십시일반으로 세워진 학교인데다 이때쯤 이미 학교의 내실을 탄탄히 다지고 있었으니 굳이 다른 대학이랑 합병할 이유가 없었어요. 문교부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학교를 합병하겠다고 하는 것은 대구대학을 무턱대고 빼앗으려는 것과 같은 조치입니다”
최염 선생님의 회고와 상관없이 당시의 정국도 문파 선생이나 대구대학에 유리할 게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어쩌면 대구대학을 눈엣가시처럼 볼 수 있었다. 비록 김구 선생은 안두희의 흉탄에 쓰러졌지만 정치적으로 김구 선생과 인연이 깊었던 문파 선생이 대구경북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있다는 자체로 불편했을 것이다. 이것은 비록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역사를 다각도로 들여다보면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만큼 정권이 옹졸하고 비겁했기 때문이다.
과연 이대로 문파선생이 무릎을 꿇을까? 대구대학은 여기서 성장을 멈추고 정부의 국대안에 흡수될 것인가... 대구대학에 드리운 먹구름은 짙고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