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대학을 일컬어 상아탑(象牙塔)이라고 한다. 상아는 알다시피 코끼리 어금니다. 코끼리 어금니는 매우 귀해 보석처럼 취급한다. 코끼리는 생명이 다하면 본능적으로 자신들만의 무덤을 찾아 길을 떠나는데 그렇게 죽은 코끼리의 무덤에 가면 상아로 탑이 세워져 있다는 전설이 있다. 대학을 일러 상아탑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의 욕심이나 유혹을 떠나 고고하게 학문을 연구하는 모습을 코끼리의 고결한 모습에 빗대어 한 말이다.
그런 상아탑이 한 때는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듣고 있었다. 우골탑, 소 뼈로 쌓은 탑이라는 뜻이다.
누구나 화랑 관창이 될 수는 없다. 대학에 등록하면 군대 입대를 연기할 수 있었다!
6·25가 터지고 삽시간에 영남 일부를 제외한 전국이 공산치하에 들어가자 서울은 물론 전국의 피난민들이 일제히 영남으로, 특히 부산으로 몰렸다. 그중에는 전국의 대학들도 몰려와 임시로 천막을 치고라도 학교를 열어놓고 있었다. 어찌 보면 ‘미친 듯한’ 대한민국의 학구열은 바로 이 전쟁통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총탄이 날아와도 공부를 해야 하고 포탄이 터져도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이다. 당시의 대학은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입학생 수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는 학구열과는 또 다른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병역특례 때문이었다.
‘대학에 들어가면 징집을 연기시켜 준다’
젊은 아들을 둔 집안에서는 눈에 띄다 못 해 눈이 튀어나올 만큼 반가운 소식이었다. 당시의 군대는 입대 즉시 실전에 배치되는, 그야말로 목숨을 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로 가는 길이었다. 정규 징집이 모자라 학도병의 이름으로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전쟁터에 끌려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대학에 등록하면 징집을 연기해 주겠다고 했으니 손이 귀한 집안이나 집안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는 당장 죽을지도 모를 아들을 살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 병역특례는 피난 상태에서 재정적 파탄에 이른 정부당국과 역시 피난통에 궁핍을 면치 못하는 대학 관계자들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의기투합한 전대미문의 합작품이었다.
모든 젊은이가 화랑 관창이 될 수 없고 모든 아버지 혹은 부모가 관창의 아버지 품일장군이 될 수는 더더욱 없는 법이다.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어느 대학이건 가리지 않고 아들들의 대학 입학을 서둘렀다. 그러나 형편이 되지 않는 사람들도 아들 귀하기는 마찬가지고 목숨 귀하기도 매일반이다. 돈이 없으니 돈을 만들어야 하고 가장 돈 만들기 쉬운 것이 집안에 기르던 소였다. 지금이야 소값이 별로 비싸지 않지만 6·25때만 해도 소의 가치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쌌다. 그러나 소가 아들보다는 귀하지 않으니 소를 팔아서라도 아들을 대학에 보내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 소뼈로 세운 탑, 우골탑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학에 등록했다고 해서 제대로 강의를 듣거나 공부를 할 수도 없었고 그렇게 얼떨결에 입학한 학생들이 공부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격을 따지지 않고 ‘개나 소나’ 다 대학에 등록한 것이다. 게다가 전란 중에 마땅한 학교 시설도 없는 데다 교수들도 뿔뿔이 흩어져 있어서 가르칠 사람도 없었다. 대학은 다만 돈을 받고 입학증서만 발부하면 되었고 그렇게 돈을 받다가 때가 되어서 졸업증서만 내주면 되는 지극히 쉽고 편한 ‘졸업장 장사’였다. 단언하건데 우리나라 사립대학의 대부분은 바로 이런 ‘우골탑의 전성기’를 이용해 전쟁 중에 막대한 부를 쌓았고 그 덕분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제각각 ‘학원재벌’들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참으로 ‘우습게도’ 당시 흔들림 없는 교수진에 학교까지 갖추고 있던 대구대학은 우골탑의 ‘우’자도 쌓지 않았다. 물론 전쟁 중이라 학교는 육군이 징발해서 쓰고 있어서 대구대학은 대구향교에 가건물을 세워두고 공부했다. 그러나 그 정도라도 갖추어 놓은 대학이 거의 없었다. ‘공부하지 않을 학생은 등록할 가치도 없다’는 것이 문파 선생의 신념이었다. 그러니 학적만 올리고 졸업증서를 받겠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대구대학에 지원할 리 없었다.
그러나 최염 선생은 이런 대구대학에서 뜻밖에도 2명의 특례입학 학생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어려운 재정난 속에서 거꾸로 학교가 장학금까지 내준 학생이었다. 그러나 학교 입학에 따른 원칙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부정입학이 아니라 하기에도 모호한, 결과적으로는 특례입학이었다.
병력특례 철회가 발표 되자 그때까지 일사불란하게 맞서고 있던 학생 중 3분의 2 넘는 수가 학적을 빼서 경북대학으로 옮겨가 버렸다. 이건 학교의 통폐합 문제를 떠나 당장 학교가 죽고 사는 문제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학교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을 억지로 붙들 수도 없었다. 대구대학에 학적을 올려놓은 채로 있다가 전쟁터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경북대학으로 학적을 옮겨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당시 최염 선생도 대구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었는데 당신의 친구들 중에서도 아주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면 모두 경북대학으로 학적을 옮겼다고 한다. 친구들이라고 뭐라 할 수도 없었다고 한다.
이 사태는 학교의 존립을 또 한 번 심각하게 위협했다.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학교에서 학생들이 대거 빠져나갔다는 것은 학교가 더 이상 지탱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아도 신입생 선발이 좌절되면서 경영상의 문제가 대두되어 있었는데 기존의 학생들마저 감소하면 재정적으로도 버틸 힘이 없어지는 것이다. 대구대학은 풍전등화였다.
권혁중 대위와 이석채 대위, 부당한 문교부와 배후 세력에 맞서 대구대학을 구해준 참군인!
“내가 처음 학교에 등록했던 1952년에 학생이 1000명 가깝던 꽤 근실한 학교였어요. 그러다가 병력특례 문제로 문교부와 갈등을 빚을 시기에는 200명도 채 되지 않을 만큼 학생이 줄어버렸어. 그나마 군대 가지 않은 180명 정도의 남학생들은 언제 군에 끌려갈지 몰랐지요”
바로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구세주 같은 2명의 군인이 나타났다. 권혁중 대위와 이석채 대위였다. 권혁중 대위는 최부자댁과 친분 있는 사람으로 최염 선생이 당시 학생처장이던 이재철 교수에게 직접 소개한 군인이다.
“권혁중 대위가 경북지구 병사부 사령부에 근무 중이었는데 이분을 만나 담소 중, 대구병무청에서 병무과장으로 있는 이석채라는 친구가 있으니 한번 만나보라 했어요. 나는 즉시 민법교수이던 이재철 교수를 모시고 권 대위와 함께 이석채 대위를 찾아갔지요.
이석채 대위를 만난 이재철 교수는 대학이 버젓이 정상적인 강의를 하고 있는데 문교부에서 정해진 법을 무시하고 대구대학만 문제시 삼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권 대위도 이런 일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있다고 거들었다.
이석채 대위는 북한 출신으로 원칙적이고 소신이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이재철 교수의 말을 듣고는 문교부의 발표가 병역법에 맞지 않다고 즉석에서 판명했다. 병역특례는 전국의 모든 대학들에게 공통으로 부여되는 혜택인데 대구대학이 아무리 문교부의 국대안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도 학교가 폐교되지 않는 이상 병역특례의 혜택은 똑같이 받을 수 있다고 단정하고 사령부에 이를 보고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문교부를 떠나 그 배후의 압력이 두려워 어지간하면 이런 말을 못 할 텐데 이석채 대위는 조금도 거리낄 것 없이 문교부의 부당함을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대구대학 병역특례에 대해서는 책임지고 해결해 보겠다고 약속하기까지 했어요. 병무청의 일개 대위가 감당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 말씀을 듣고 할아버지가 큰 용기를 얻으셨지요”
이석채 대위는 실제로 대구대학 학생들이 병력특례를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문교부도 더 이상 대구대학에 대해 압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마침 그 무렵 국대안의 입안자였던 백낙준 문교부장관이 물러나고 김법린 장관이 취임했는데 그때부터는 더 이상 대구대학의 합병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대구대학은 다시 신입생들을 뽑을 수 있었고 급속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국대안 파동으로 인한 피해는 대구대학 발전의 시계를 최소한 5~6년은 늦추어버렸다.
이석채 대위는 이 일로 대구대학에 큰 은인으로 불렸다. 이석채 대위와 권혁중 대위 두 사람은 육사 8기 출신인데 대구대학이 두 사람의 기여를 고맙게 여겨 특별히 입학시켜주었다. 이석채 대위는 그때 법학과를 전공했는데 바쁜 군무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에게 와서 개인적으로 특강을 듣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해 결국 법학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런데 바로 이 학위로 인해 이석채 대위 인생에서 매우 특별한 일이 생기게 된다. 5·16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출범했는데 이때 이석채 대위가 법사위원장의 중책을 맡은 것이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대부분 군출신 인사들이 보직을 차지했는데 법학과 나온 장교가 없어서 마침 대구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이석채 대위가 그 자리에 발탁이 되었고 나중에 감사원장까지 지내게 된다. 또 이재철 교수는 제자인 이석채 대위의 추천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법률 자문역할을 맡게 되었고 뒤에 인하대학교 총장을 지내게 된다. 만약, 당시 이석채 대위가 권력에 휘둘려 병역특례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았다면 대구대학은 존재하기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