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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 문무왕 염원 깃든 동해 유적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3호 입력 2026/08/20 09:59 수정 2026/08/20 10:05
경주를 걷다, 신라인을 만나다 [12]|대왕암·감은사·이견대

경주는 1천년 동안 신라의 수도로 번성하며 수많은 역사적 사건의 무대가 됐다. 그 흔적은 지금도 경주 곳곳에 남아 있다. 그 흔적은 신라에 살았던 이들을 떠올릴 수 있는 타임머신이다. 경주에 남은 고대 유적을 둘러보며 옛 신라인을 만난다. /편집자 주

 

문무왕의 유골이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 경주 문무대왕릉(대왕암) 전경. <사진=국가유산청>확대
문무왕의 유골이 봉안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북 경주 문무대왕릉(대왕암)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문무왕은 당의 침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5년 뒤인 681년(문무왕 21) 7월 1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후 태자 김정명이 새 왕으로 즉위하는데 그가 31대 신문왕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죽음을 목전에 둔 어느 날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긴다.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관 앞에서의 왕위계승은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이어지는 법통과 권위를 확인시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가 왕위계승을 염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안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다. 실제로 신문왕 즉위 직후 왕의 장인인 김흠돌의 반란이 일어난 점으로 미뤄보면 이 같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김흠돌은 유력 진골귀족으로 귀족세력에 대한 신문왕의 억압 정책에 강한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의 신속한 대응으로 반란은 진압됐지만, 진골귀족 세력의 반발은 일시적으로 잠재워졌을 뿐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문왕의 지지세력은 무열왕계와 김유신계, 일부 진골귀족, 구 백제계·고구려계 등이었다. 이들은 신문왕에게 비판적이었던 전통적인 진골귀족과는 지향점이 달랐다. 따라서 귀족세력 상호 간의 대립과 갈등은 신문왕대의 정치에 적지 않은 파장을 가져왔다.

만파식적은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왕권을 확립해가던 신문왕대 초기에 등장한다. 만파식적은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보물이었고 동시에 호국적인 기능을 하고 있었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과 김유신의 위덕에 의한 신비한 물건으로 상징되기도 했다. 만파식적을 보관한 천존고(天尊庫)라는 이름, 효소왕대에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고 봉작하니 혜성이 사라졌다는 일 등은 모두 그 신성함을 표현한 것이다.

사실 무열왕계의 등장 이전에 이미 호국을 상징하는 국가적 보물인 ‘신라삼보’가 있었다. 그런데도 다시 만파식적이 등장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신라삼보가 성골왕실의 상징적 보배였듯, 신문왕은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대변하기 위해 만파식적을 등장시켰다. 대왕암(大王巖, 문무대왕릉)과 감은사(感恩寺), 이견대(利見臺)는 만파식적과 관련이 깊은 유적이자 문무왕과 관련된 유적이다.


감은사와 문무왕의 염원


681년 문무왕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신문왕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에 장사를 지냈다. 감포 앞바다에서 200m가량 떨어진 사적 158호 대왕암에서 장사를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로 둘러싸인 대왕암 중앙에는 남북으로 길게 넓은 돌이 놓여 있는데, 돌 밑에 문무왕의 유골이 봉안됐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신문왕이 문무왕을 위해 지었다는 감은사 터는 대왕암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대왕암이 바라보이는 곳에는 이견대가 있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게 된 것은 재위 다음해인 682년의 일이다. 신문왕은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한 이듬해 5월 동해변의 감은사에 행차했다. 이곳 앞바다에서 용과 33천(天)의 아들로 각각 변한 문무왕과 김유신이 보낸 사자로부터 흑옥대를 얻고 만파식적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왕위에 오른 뒤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 그러나 일연이 ‘삼국유사’ 만파식적조 주(註)에 인용한 ‘감은사 사중기(寺中記)’에는 다소 다른 기록을 전하고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됐다. 그 아들 신문왕이 682년(신문왕 2)에 절을 완성했다. 금당 섬돌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는데 용(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려고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언으로 유골을 보관한 곳을 대왕암이라고 하고 절의 이름은 감은사로 했다. 뒤에 용이 모습을 드러낸 곳을 이견대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이견대 전경. <사진=국가유산청>확대
이견대 전경. <사진=국가유산청>
사실 신라는 고대국가 형성기부터 끈질기게 괴롭혔던 왜의 침략을 막아야 했다. 지리적 여건으로 볼 때 감은사 옆을 지나는 대종천은 동해에서 경주까지 가는 가장 가까운 뱃길인 만큼, 왜구 침략이 빈번했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문무왕은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염원을 안고 재위기간 동안 이 절을 세우려했으나 공사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유업을 아들인 신문왕이 이어받아 완성한 뒤 부왕의 명복을 빌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감은사의 완성이 신문왕 즉위 이듬해인 것을 보면, 공사는 이미 문무왕대에 상당 부분 진행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감은사의 완공은 신문왕 즉위 직후 이뤄진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왜병을 진압하려 했던 선왕의 뜻을 이어받아 사원 건립을 마무리짓고 그의 덕을 추모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 이름을 ‘감은’이라 하고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으로 구멍을 내어 용이 들어오도록 한 것 등은 모두 아버지 문무왕에 대한 추모의 뜻을 담은 것으로 짐작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문무왕은 평소 지의법사에게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는 것이 소원”이라며 죽은 뒤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될 것을 늘 염원했다.

이들의 대화에서 문무왕이 “나쁜 업보로 인해 축생이 된다”고 언급한 것과 감은사 금당 계단 아래에 바다로 향한 구멍을 뚫어 용이 드나들게 했다는 것 등에는 불교의 윤회사상이 담겨 있는데, 이는 이 시기 신라인들의 내세관이 반영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문무왕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수호하는 호국대룡이 되고자 염원한 것은 죽은 뒤에도 그 혼이 사라지지 않고 위급할 때 음조(陰助)를 내린다고 믿던 신라인의 생각과 호국적 불교 신앙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감은사가 있던 자리. 감은사지는 대왕암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다. <사진=국가유산청>확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감은사가 있던 자리. 감은사지는 대왕암에서 2km가량 떨어져 있다. <사진=국가유산청>


정치적 의도로 등장한 만파식적 설화


신문왕은 김흠돌의 난은 평정했지만 내부의 적을 소탕한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안팎으로 선포하는 상징이 필요했다. 진평왕 시대에 등장한 천사옥대와 황룡사 장육존상, 황룡사 구층탑 같은 삼보(三寶) 외에 통일신라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상징물이 절실했다. 신문왕은 그 상징물을 동해의 용이 된 아버지 문무왕과 전쟁 영웅 김유신의 권위에서 발굴해냈다. 만파식적과 흑옥대는 신문왕의 위대함을 보증하는 신화였고 자신만을 위한 ‘왕권신수설’이었다. 신문왕이 즉위 2년째인 682년 5월 7일 이견대로 행차한 ‘삼국유사’ 기록에 만파식적과 흑옥대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이후 정국은 어느 정도 안정됐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은 이견대와 감은사, 대왕암을 오가며 11일 동안 왕궁을 비웠다. 대나무와 흑옥대를 얻는 과정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을 용과 천신으로 함께 등장시킨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두 영웅이 손을 잡고 자신의 뒷배를 봐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흘리는 효과가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에 따르면 신문왕은 왕궁으로 돌아오는 길에 얽힌 상징적인 신화를 하나 더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바로 용연(龍淵)이다. 옥대에서 옥 한쪽을 하나 떼어내 시내에 던지자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용이 솟아오른 시내는 못이 됐고 용이 하늘로 오르면서 뚫고 오른 바위가 폭포가 됐다는 내용이다. 이제 왕은 바다 속의 용, 물에 사는 용의 수호를 받고 있다. 옥대에 있는 옥의 쪽이 모두 용이라는 사실을 용연에서 증명했다. 수많은 용의 호위를 받고 있다는 의미다. 이 신비스런 일의 내막은 태자 이흥(효소왕)이 왕궁에서 말을 타고 와 알려줬다. 신화에 아들을 등장시켜 아들의 왕위계승에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처럼 만파식적과 관련된 설화는 김흠돌의 난 이후 나라의 안정과 호국을 내세워야 했던 당시 정치·사회적 배경에서 나왔다. 문무왕과 김유신을 끌어들여 무열왕권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상징하는 장치였던 것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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