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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봉황대를 바라본 서로 다른 시선

경주신문 기자 gjnews21@hanmail.net 1743호 입력 2026/08/20 09:53 수정 2026/08/20 09:54
경주의 조선 스토리(218)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확대
오상욱 시민전문기자경북고전번역연구원원장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크고 작은 고분군 14기 가운데 봉황대(鳳凰臺)는 지름 82m, 높이 22m 큰 규모의 무덤으로 눌지왕·자비왕 등 매장 인물이라 추정되지만, 주변에 금관총(金冠塚)ㆍ식리총(飾履塚)이 5~6세기경 고분임을 생각할 때 봉황대 역시 비슷한 시기로 보인다. 2011년 7월 28일에 경주봉황대고분이 있는 경주노동리고분군이 경주 대릉원 일원에 포함되어 사적으로 재지정되었다. 지금의 봉황대는 남쪽으로 황리단길, 서쪽으로 금리단길 등 관광지의 중심에 우뚝 솟아있고, 모양은 무덤같지만 봉황대의 ‘대(臺)’ 기능으로 보면 먼 곳을 조망하는 전망대로 활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졸옹 홍성민(1536~1594)은 『계림록(鷄林錄)』에서 “성의 남쪽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봉황대가 있는데, 올라가서 바라보면 산하를 옷깃과 띠처럼 둘러싸 안팎이 한 방향으로 사면을 두르고 막아 견고함을 이룬다. 그것은 아마도 흙을 쌓아 산을 만들고 겹겹이 솟아 수백 리 사이에 잇달아 서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인지를 모르겠지만, 지형의 허한 곳을 눌러 그 왕성함을 돕고자 함일 것이다.”라고 우뚝 솟은 봉황대와 주변 산세가 성을 둘러싸는 형국을 이루며, 지형적으로 허한 곳을 보완하여 왕성함을 돕는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이는 후대의 풍수적 지리 인식과도 연결하여 살펴볼 수 있다.

도촌 강홍중(1577~1642)은 1624년 통신사로 경주를 지나며 “봉황대는 성밖 5리쯤에 있으니, 곧 산을 인력으로 만들어 대를 세운 것이다(鳳凰臺在城外五里之內 卽造山而爲臺者也). 비록 그리 높지는 않으나 앞에 큰 평야가 있어 시야가 훤하게 멀리 트였으니, 월성ㆍ첨성대ㆍ금장대ㆍ김유신묘가 모두 한눈에 바라보였다.”라고 봉황대를 인력으로 만든 산 그리고 전망대로 표현하였다.

퇴우당 김수흥(1626~1690)은 1660년 경주를 다녀가고 『남정록(南征錄)』에서 “먼저 봉황대 … 꼭대기에 오르니, 사방의 조망에 거리낌이 없었다. 대의 전후좌우에 인공으로 만든 산 수십 곳이 있는데, 대나무와 나무가 무더기로 자라나 마치 개밋둑 같았지만, 유독 이 대만은 인공으로 만든 산이 아니라고 한다.”라고 주변의 고분들은 모두 인공산이라고 인식하면서도 봉황대를 무덤이라기보다 하나의 자연 언덕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석당 김상정(1722~1788)은 1760년 경주를 다녀가고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에서 “봉황대에 올랐는데, 꼭대기는 평평해서 백열 명이 앉을 수 있었고, 마침 넓은 들판 가운데에 있어 사방을 바라보기에 좋았다.”라고 꼭대기의 형태를 언급한다.

당주 박종(1735~1793)은 1767년 경주를 다녀가고 『동경유록(東京遊錄)』에서 “봉황대는 남문 밖에 있다. 그 근처에는 알 모양의 흙봉우리가 매우 많은데 모두 사람이 만든 것이며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봉황대를 포함한 주변의 토봉을 모두 인공으로 조성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봉황대 모양은 무덤과 유사하지만,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봉황대에 올라 사방의 경관을 조망한 기록이 반복적으로 나타나, 적어도 후대에는 경관을 조망하는 장소로 인식되고 활용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유물적 가치와 사료적 가치는 서로 다른 개념이지만 결코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물이 존재해야 역사 연구가 가능하며, 역사적 연구가 이루어져야 유물의 진정한 의미도 밝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봉황대의 피장자를 확인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실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문헌 자료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사람들은 봉황대를 인공으로 조성한 산이나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대(臺)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오늘날 고고학적 해석과는 다른 봉황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봉황대의 가치는 과거를 보여 주는 데만 머물지 않는다. 봉황대는 신라의 찬란한 문화를 후손에게 전하고 우리 문화유산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교육자료이자 관광자원이다. 또한 지속적인 발굴과 과학적 연구를 통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가능성도 크며, 무덤으로 추정되는 봉황대를 활용한 방안을 찾아 문화재를 단순히 보존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활용해야 할 것이다.

봉황대는 ‘상서로운 봉황의 대(臺)’로 표현되지만, 조선후기의 문인들은 ‘인공산’ 또는 ‘토봉’으로 이해했으며, 현대 고고학은 이를 신라의 적석목곽분으로 해석한다. 하나의 공간이 시대마다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받았다는 점 자체가 봉황대의 또 다른 사료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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