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가 피부에 와닿을수록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일이다. 일회용품 하나를 덜 쓰고, 버려지는 물건을 다시 사용하고, 아이들에게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작은 실천도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변화를 먼저 실천해 온 환경활동가들의 경험과 생각은 지역의 환경정책을 고민하는 데도 의미 있는 목소리가 된다.
경주에서 환경모임 ‘숲을’과 함께 활동하는 엄혜린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장주머니를 들고 시장을 찾고, 물티슈와 종이컵을 거절하며, 연극으로 아이들에게 생명과 공존의 가치를 전하고 있다.
지진이 바꾼 삶, 환경을 바라보다
엄 씨가 환경 문제를 자신의 삶과 연결해 바라보기 시작한 계기는 가족과 함께 겪은 두려움이었다. 울산 북구에서 세 아이를 키우던 그는 원전 반대 서명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사는 곳과 원전이 가깝다는 사실을 새삼 체감했다.
이후 경주에서 지진이 발생했을 당시 백일 된 아이를 안고 고층 아파트를 뛰어 내려왔던 경험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꿨다. 둘째 아이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밖으로 나왔고 이후 한동안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미세먼지·폭염·폭우·가뭄 등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사람뿐 아니라 다양한 생명체가 하나의 지구에서 연결돼 살아간다는 생각도 갖게 됐다.
경주로 이사한 뒤에는 아이들과 산책하며 눈에 띄는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그러다 ‘숲을’에서 활동하는 지인을 만나면서 혼자 하던 실천은 다른 시민들과 함께하는 활동으로 넓어졌다.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황오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숲을’은 시민들이 일상에서 쓰레기를 줄이고 재사용을 실천하도록 돕는 열린 환경모임이다. 황성시장에서는 비닐봉지 대신 장주머니를 사용하는 문화를 만들기 위한 캠페인과 설문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앞으로는 빈 용기를 들고 방문하는 손님을 환영하는 ‘용기내 가게’를 발굴해 지역 상점들과 연대하는 방안도 구상하고 있다.
쓰레기 줍기·무포장 장터를 비롯해 되살림 바느질·도자기 킨츠키(도자기 수리기법) 등 물건을 버리기보다 다시 사용하는 활동도 이어간다.
하지만 현장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벽은 ‘편리함’이다. 시장에서 만난 시민들도 일회용품을 줄여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대체로 공감했지만 “장바구니를 들고 다니지 않는다”, “다회용기는 무겁다”는 반응도 있었다.
엄 씨는 “편리함을 조금 내려놓을 용기가 필요하다”며 “물티슈 대신 손수건을 쓰고, 비닐봉지 대신 장주머니를 사용하고, 종이컵 대신 다회용 컵을 써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실천은 ‘거절’이다. 식당이나 상점에서 필요하지 않은 일회용품을 건네면 “괜찮습니다”라고 말하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한 사람의 거절이 당장 큰 변화를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상인에게 소비자의 달라진 요구를 알리는 작은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형극으로 전하는 ‘같이 살기’
환경을 향한 관심은 전공인 연극과도 이어졌다. 엄혜린 씨는 울산의 대안문화공간에서 환경연극 대본을 쓴다는 소식을 접한 뒤 기후위기 관련 책을 읽고 토론하며 작품 제작에 참여했고, 4년째 환경 인형극 공연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 작품인 ‘벌집아파트에 비는 내리고’는 기후위기와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동물 인형을 통해 보여준다. 벌집아파트에 사는 동물들이 층간소음·택배 문제 등 일상의 갈등을 겪다가 재난을 맞닥뜨리면서 서로 협력하고 공존하는 과정을 담았다. 아이들에게는 동화적 재미를, 어른들에게는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는 이런 경험이 아이들에게 다른 생명을 바라보는 감수성을 키우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있다.
시민의 실천, 경주시 정책으로 이어지길
엄혜린 씨가 기대하는 것은 시민들의 작은 환경 실천이 행정과 만나 지역의 문화로 확산되는 것이다. 그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경주의 특성을 고려해 황리단길 등 특정 지역을 일회용품 사용을 줄이고 장주머니와 다회용기 이용을 권장하는 이른바 ‘지구시민 구역’으로 운영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다회용기를 이용하는 소비자에게 혜택을 제공하고 참여 상점에도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다. 관광객의 편의를 무조건 줄이기보다 상인과 소비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 새로운 관광문화를 조성해보자는 취지다.
민간 환경단체의 캠페인만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시민·상인·환경활동가와 경주시가 함께 현장의 제안을 논의하고 행정의 지원과 제도로 연결해야 일회성 캠페인을 넘어 생활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엄 씨는 “지금 하고 있는 제로웨이스트 활동에 경주시도 함께해 지구시민이 함께 살아가는 경주가 됐으면 좋겠다”며 “울산에서 하고 있는 생태환경 인형극도 경주시민들에게 보여줄 기회가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후위기는 거대한 문제지만 변화의 시작은 결국 일상이다. 동시에 개인과 민간단체의 실천만으로 지역 전체의 변화를 만들어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현장에서 먼저 움직이며 시행착오를 경험한 환경활동가들의 생각과 제안을 지역사회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경주시 역시 이들의 목소리를 환경정책을 만들어가는 하나의 축으로 받아들이고 실현 가능한 방안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시민의 작은 실천에 행정의 제도와 지원이 더해질 때 경주는 문화유산을 지키는 도시를 넘어 앞으로 살아갈 환경까지 함께 지키는 도시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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