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뻔한 공간, 다시 깨어나다 국립경주박물관의 북측 한켠, 소박한 기와지붕을 얹은 건물이 있다. 1979년 지어진 ‘서별관’이다. 처음에는 박물관 사무시설로 사용됐고, 이후 내부를 수장고로 개조해 발굴 문화유산을 보관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그러나 2019년 영남권수장고 ‘신라천년보고’가 새로 문을 열면서, 서별관은 기능을 상실한 채 한동안 방치돼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이 공간을 폐기하거나 단순 보수하는 대신,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길을 택했다. 그렇게 서별관은 2022년 12월, 신라의 역사와 문화를 아카이빙하는 전문 도서관 ‘신라천년서고’로 거듭났다.   시대를 품은 건축, 한계를 넘다 서별관은 한옥을 모티브로 설계됐다. 정면 5칸, 측면 3칸, 전통 한옥형 기와지붕을 갖췄지만 실제 재료는 철근콘크리트였다.   1970년대 한국 건축계가 품었던 ‘전통 재현’에 대한 열망과 당시의 경제적·기술적 제약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탄생한 결과물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신라 목조건축을 재현하려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테일은 어색했다. 목구조 특유의 섬세함은 콘크리트 질감 속에 갇혔고, 단순화된 부재와 거친 시공이 전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어설픔 속에서도 서별관은 시대정신을 증명하는 중요한 건축유산으로 남았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외형을 존중하되, 내부에 현대적 기능과 해석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리노베이션을 선택했다. 신라천년서고는 과거의 외형을 크게 변경하지 않고, 내부를 완전히 재구성했다. 기존의 칸막이와 천장을 철거하고 콘크리트 구조를 노출한 뒤, 그 위에 새로운 공간 질서를 부여했다. 로비 상부에는 대형 거울이 설치돼 비대칭 구조를 반사해 대칭의 환영을 만들어낸다. 좁은 공간을 무한히 확장시키는 듯한 착시 효과는 지식의 세계가 한계를 넘어 펼쳐진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서가의 배치는 고려시대 해인사 장경판전의 판가 구조에서 영감을 얻었다. 책과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를 구성하며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방식이다. 신라시대 도서관 건축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오래된 지식 보관 건축의 정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공간에 담아낸 것이다.   구축 방식의 재해석 건축적으로 신라천년서고는 흥미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서별관은 본래 스테레오토믹(덩어리 쌓기) 방식으로 지어졌다. 목구조를 흉내 내었지만 실제로는 콘크리트를 쌓아올린 구조였다. 이번 리노베이션에서는 이 콘크리트 골조를 바탕으로 내부에 텍토닉(구성 요소를 잇는 구조)적인 감성을 새롭게 입혔다. 건물의 뼈대를 존중하면서도 그 위에 가볍고 따뜻한 책의 구조를 덧대어 과거와 현재를 매끄럽게 연결했다. 그 시대의 정신을 현대 기술과 감성으로 이어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역사성(Novel Historicity)’이라는 개념이 공간 속에 실현된 셈이다.   신라의 숨결을 품은 책의 숲 신라천년서고는 지식을 보존하고,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신라와 경주 관련 역사, 문화, 고고학 분야 문헌과 기록이 체계적으로 수집되고 있다. 연구자와 시민 모두에게 열려 있으며, 신청을 통해 열람 및 자료 이용이 가능하다. 책장을 넘기면, 과거 신라인들의 숨결과 오늘 우리의 사유가 맞닿는다. 경주의 천년 시간을 관통하는 새로운 문화적 거점이 탄생한 것이다.   [관람정보] 신라천년서고는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된다. 주말과 공휴일은 휴관하며 연구 목적을 위한 문헌 열람은 별도 신청을 통해 가능하다. 경주 시민과 방문객들은 누구나 이곳을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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