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의 영예’라는 뜻을 가진 브누아 드 라 당스(Benois de la Danse)는 프랑스의 발레 개혁가 노베르(Jean-Georges Noverre, 1727-1810)를 기리기 위해 1991년 국제무용협회 러시아 본부에서 제정한 상으로, 무용계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릴 만큼 권위가 있다. 우리나라 무용수로는 강수진(1999년)을 시작으로 김주원(2006년), 김기민(2016년), 박세은(2018년), 강미선(2023년), 이상 5인이 수상했다. 대한민국은 무용마저도 강국이다. K-무용이라 해도 무방하다.
노베르는 발레가 춤출 수 있는 드라마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무언극의 기법을 처음으로 발레에 도입하여 발레 닥시옹(ballet d’action)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를 ‘발레계의 셰익스피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발레에서 팬터마임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노베르 덕분이다. 노베르의 발레 개혁은 동시대를 살았던 오페라 개혁가 글룩(Christoph Willbald Gluck, 1714-1787)에 견줄만하다.
19세기 중후반 파리에서 번성하던 낭만발레가 갑작스레 퇴색한 이유는 당시 발레가 소위 노베르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내용을 상실한 무용수의 형식적인 움직임이 비판을 받았고, 유산계급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한 발레는 더이상 파리 무대에 설 수 없었다. 발레의 무게중심이 급속히 러시아로 쏠렸다. 러시아는 19세기 말 황실의 배려와 외국인 발레 예술가들의 활약으로 세계발레의 중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이후 황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과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을 중심으로 쌓인 내부역량은 20세기가 되자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외국인이 아닌 러시아인들이 발레계를 지배하기 시작하는데, 그 중심에 발레뤼스(Ballet Russe)가 있다. 발레뤼스는 불어로 ‘러시아 발레단’이란 뜻이다. 발레뤼스에서 발레의 전통이나 관습으로부터의 탈피가 시도되었다.
발레뤼스를 논할 때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1872-1929)를 빼놓을 수 없다. 디아길레프는 타고난 기획자이자 흥행사였다. 일찍이 파리에 진출한 그는 러시아 발레가 파리에서 통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디아길레프는 1909년 5월 18일 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러시아 발레를 소개하기 위해 모스크바 최고의 무용수 35명을 이끌고 첫 공연을 했는데, 이 공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는 파리 공연의 대성공에 힘입어 일회성으로 끝날 수 있었던 팀을 발레단 ‘발레뤼스’로 정식 창단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발레의 본고장 파리와 서유럽을 발레로 정복해버린다.
디아길레프의 사람을 보는 혜안과 뛰어난 캐스팅 능력은 발군이다. 스트라빈스키, 포킨, 니진스키, 안나 파블로바 등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스타들이 그의 드림팀 멤버다. 사실 발레뤼스는 디아길레프 그 자체였다. 그가 1929년 57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죽자 발레뤼스는 창단 20년 만에 해체된다. 그리고 발레뤼스의 위대한 스타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져 그 지역에서 발레의 아버지가 된다. 미국발레의 아버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1904-1983)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