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도시이다. 신라 천년의 수도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이곳에서 윤경렬(1916~1999) 선생은 진정한 한국의 미를 찾고자 평생을 바쳤다. 그는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라 우리 고유의 미를 인형으로 형상화하여 보급하고,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헌신한 문화운동가였다. 윤경렬 선생은 조선풍속인형을 보급하고자 1943년 개성에서 고려인형사를 열었으며, 우리나라 미술사학의 선구자인 고유섭 선생과의 만남을 통해 깊은 자극을 받았다. 고유섭 선생은 윤경렬 선생이 일본에서 3년간 인형 제작을 배운 것에 대해 ‘손끝에 밴 일본의 독소를 빼려면 10년은 족히 걸릴 것’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이러한 혹평 속에서 그는 고민에 빠졌고, 서양화가 오지호 선생으로부터 ‘우리의 미는 우리 땅, 우리 기후, 우리 생활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조언을 듣고 경주로 향하게 된다. 그에게 경주는 단순한 연구의 대상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한국의 미를 구현할 수 있는 성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윤경렬 선생은 경주를 동경해왔다. 형 윤상렬이 보내주던 《어린이》 잡지를 통해 접한 서라벌의 신화적인 이미지, 민족 문화의 정수로 자리 잡은 경주는 그의 내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결국 그는 연고도 없는 경주로 와서 경주 남산과 서라벌의 흔적을 찾아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린이들에게 한국의 문화적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일본에서 배운 기술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길어 올린 미를 담아 풍속 인형을 제작했고, 그 과정에서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새롭게 창조했다. 하지만 윤경렬 선생의 업적은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는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외면당했고, 정규 학력이 없다는 이유로 주류 학계에서도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은 경주를 넘어 전국으로 뻗어 나갔고, 그의 제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문화유산 보존과 전승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오늘날, 경주는 APEC 성공을 위해 분주하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APEC인지, 그 정체성을 명확히 해야 한다. 경주가 가진 문화적 가치와 정체성을 살리는 것이야말로 APEC 성공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윤경렬 선생이 경주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꿈은 바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에 자긍심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남산을 조사하고 서라벌의 흔적을 찾아내어 아이들에게 전해 준 것처럼, 경주는 단순한 국제행사 개최지가 아닌, 우리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는 중심지로 거듭나야 한다. 윤경렬 선생을 연구하고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삶을 기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문화적 유산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고, 미래를 향한 방향성을 설정하는 중요한 과정이다. 이제는 그가 남긴 유산을 단편적인 에피소드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체계적인 연구와 평가를 통해 그의 업적을 정당하게 조명해야 한다. 경주의 문화적 정체성을 되살리고 이를 세계와 공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윤경렬 선생이 꿈꾸던 경주의 모습이며,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다. 경주 APEC의 성공은 단순한 행사의 성과가 아니라, 경주가 가진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 속에 우리의 가치를 알리는 데 있다. 경주를 한국의 미를 구현할 성지로 본 윤경렬 선생의 삶을 통해 우리는 기본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전할 것인가? 경주의 가치는 바로 그 답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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