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방송계에서 알 만한 모 선배가 노무현 정권 당시 KBS 사장을 지낸 경주 출신 정연주 사장에 대해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정연주 사장이 경주고 출신 KBS 직원들을 모으고는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내가 사장으로 있는 동안 경주고 출신 직원들은 승진이나 보직 변경을 못 하니 양해해 달라!” 그 선배는 정연주 사장이 자신의 청렴함을 지키기 위해 경주고 출신들을 역차별했다며 매우 분개했다. 그리고 경주고 출신 직원들은 그날 이후 정연주 사장을 사람 취급도 안 했다고 성토했다. 그 선배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그 뒤로 경주고 출신의 방송인들은 정연주 사장이 재직하는 동안에는 승진에서 누락 되었고 좋은 보직에도 가지 못한 모양이다. 그날 이후 나는 정연주 사장이란 분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먼저 그 말이 사실인지를 당사자에게 직접 듣고 싶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청렴도 좋고 학연이나 지연을 배제하는 것도 좋지만 역차별은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 물어보고 싶어서였다. 나 역시 경상도 지역에서 남발되는 ‘우리가 남이가!’ 식의 풍토를 혐오하지만 동고향이거나 동문이라는 사실이 역차별의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더 억울하고 더 억지스러운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더구나 경주고 출신 직원들이 실제로는 중용되었거나 좋은 보직을 받았다면 이런 후일담은 생기지 않았을 것인데 그렇지 않았으니 시기가 많이 지나고도 그런 이야기가 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편 만약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내 추측으로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상도 사람들에게 진보 계열의 인사라면 노골적으로, 혹은 은연중 반감을 가지는 심정이 많아 이렇게 와전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박정희 시대 이후 굳어진 지역감정은 그 이후의 정치적 계보에 따라 심각할 정도로 첨예화 되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지경으로 왜곡되고 변형되었다. 그로 인해 박정희의 계보를 잇는 정당과 김대중의 계보를 잇는 정당은 그 정당의 정책이나 올바름을 떠나 맹목적적으로 신뢰받거나 배제되는 꼴이 되었다. 지역적으로 경상도는 박정희 계보, 전라도는 김대중 계보 식의 정당으로 편이 나누어진 것은 역사적 불행이고 국민적 비극이지만 그런 것을 현명하게 따질 풍토가 아니었다. 그러니 김대중 계보를 곧바로 이었던 노무현 정권에서 KBS 수장이 된 정연주 사장이 경주 출향 방송인들에게 배척받는 일도 일어날 법했을 것이다. 그러다 최근 계엄 내란과 관련한 재판 과정에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지켜 보면서 경상도 사람들, 경주 사람들의 감정들이 궁금해졌다. 재판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내란을 준비하기 위해 미리부터 자신이 졸업한 충암고 출신들을 대거 중용했다는 사실이다. 굳이 내란과 연관 짓지 않아도 그 요직의 면면을 보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충암고 출신들을 기용한 것이 쉽게 보인다. 국방장관 김용현, 행안부장관 이상민, 방첩사령관 여인형, 777사령관 박종선이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내란 관련 재판이 계속되면서 핵심적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대거 포함된 것을 우연이라 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굵직굵직한 인사만 해도 이 정도인데 그 밑에 또 얼마나 세부적인 기용이 있었을지 알 수 없다. 계엄이 국민의 의지로 저지되고 그 계엄에 참여한 핵심 인사들이 모두 법정에 서 있는 마당에 윤석열 대통령이 미리부터 계엄을 준비했네 안 했네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방송에 나와 계엄을 선언했고 군인들이 중무장한 채 국회와 선관위로 쳐들어가 횡행하는 모습을 국민 대부분이 밤을 새워가며, 가슴 조여가며 지켜본 엄연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의원이냐 요원이냐, 질서유지냐 아니냐, 세 시간짜리냐 아니냐, 계엄령이냐 계몽령이냐 등의 내용들은 모두 곁가지일 뿐이다. 그러나 경주를 포함한 경상도 지역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옹호하고 계엄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형편이다. 50년 전 정치인들이 나누어 놓은 지역감정들로 인해 2025년 지금, 내 권리와 내 안전이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좋은 것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 정연주 사장이 자신과 관련한 이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일지 궁금하다. 혹은 자신이 이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그때 경주 출신 직원들을 대거 등용했었어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한번 물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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