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주엔 신라 문화유산의 보존을 명분으로 설립된 조선총독부의 관변 단체가 있었다. 1913년 5월 발족한 경주고적보존회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재단법인으로 출발했는데, 1912년 11월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의 경주 방문이 설립의 계기가 됐다고 한다. 총독이 3일간 경주에 머문 동안 석굴암 등지를 둘러보고, 일본인 관리와 경주에 살던 일본인들이 함께 경주 고적에 대한 전반적인 사안을 논의하는 가운데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주류 학계의 견해다. 경주고적보존회는 이듬해인 1913년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의 내아(內衙) 건물 등을 이용해 신라 문화유산을 전시하는 진열관을 열었다. 경주 첫 박물관의 시작이었다. 당시 진열관이 있었던 곳이 경주시 동부동에 있는, 지금의 경주문화원 자리다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으로 출발 경주고적보존회는 1913년 하반기부터 문화유산들을 보관 전시하기 시작했다. 1915년에는 인근의 조선시대 건물(부사·양무당)을 옮겨와 공간을 확장하고 시민들에게 개방되었으며, 전시관 본관 건물엔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1915년 9월 중순에 쓴 ‘온고각’(溫古閣)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온고’는 ‘논어’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알고 새것을 안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당시 진열관에는 경주의 사찰과 유적 등에서 옮겨온 문화유산과 개인 수집품 등이 전시됐다. 백률사의 이차돈순교비와 송화산 출토 석조반가사유상 등이 대표적이다. 1916년에는 경주 읍성의 남문 밖 봉황대 옆에 있던 성덕대왕신종과 그 종각을 옮겨왔다. 이 종각은 경주문화원에 아직도 남아 있다. 1921년 신라 금관의 첫 발견은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의 전환점이 됐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유물을 현지에서 보존하기 위해 경주고적보존회는 경주 사람들의 기부금을 모아 ‘금관고’(金冠庫)라는 이름의 건물을 새로 지었던 것이다. 금관고를 통해 신라 금관을 비롯한 금관총의 화려한 출토품들이 전시되자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은 1923년 5월까지 2만3000여명의 관람객이 방문하는 등 경주의 주요 관광지로 자리 잡아 갔다. 이후 이곳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재개관한다. 1926년 6월의 일이다. 박물관 개관 이후 서악역이 경주역에 통합되면서 경주역 부지가 확장되고 경주역사도 신축된다. 이와 함께 고적지 정비가 속속 이뤄지며 경주를 찾는 관광객이 계속 증가하며 이 시기를 즈음해 경주는 조선 최고의 고적 관광도시로 부상하게 된다. ‘조선일보’는 1929년 10월 29일자 기사에 경주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산이라면 금강산이고, 고적지는 경주며, 예술의 극치를 만날 수 있는 곳이 경주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재탄생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은 광복 후 국립박물관이 설립됨에 따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재탄생한다. 최순봉 관장과 직원들은 일본인 직원으로부터 소장품과 시설 일체를 인수해 1945년 10월 7일 경주분관의 문을 열었다. 같은 해 12월에는 미군정의 협조를 받아 부산과 대구에서 일본인 사업가가 소장하고 있던 문화재를 회수했다. 이듬해엔 국립박물관의 일원으로 호우총(壺衧塚)과 은령총(銀鈴塚) 발굴조사에 참여했다. 호우총과 은령총 발굴은 우리 손으로 한 첫 번째 발굴조사였다. 당시 경주문화원 자리에 있던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건물들은 대부분 옛 한옥 건물을 고쳐 사용한 탓에 화재에 취약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더구나 광복 이후 소장품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전시품을 소개할 전시관도 필요했다. 1950년대 중반 연간 5만여명 정도였던 관람객도 차츰 늘면서 1960년엔 개관 이후 처음으로 연간 관람객이 10만명을 넘어섰다. 이런 이유로 박물관 측은 1961년 전시관 본관인 온고각 뒤에 2층 규모의 신관(新館)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도시 개발과 도로 확장으로 경주 각지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면서 소장품 수도 급증하게 된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를 담기에 동부동 박물관은 너무 좁았다. 이에 박일훈 관장은 1966년 박물관 신축 계획을 입안하고 계획안 100부를 인쇄해 관련 부처에 청원하기에 이른다. 이런 노력 끝에 1967년 4월 대통령 지시각서 11호로 경주박물관 신축이 결정되고 이듬해 부지선정 작업이 진행됐다. 새 박물관 자리로 여러 곳이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자리인 월성 남쪽 인왕동 들판으로 정해지면서 1968년 10월 4일 첫 삽을 뜨게 된다. 새 박물관의 설계는 이희태(1925~1981)가 맡았다. 앞서 김중업(1922~1988), 강봉진(1917~1998) 등이 설계에 참여했지만 ‘서구적’이거나 ‘고답적’이라는 반대 의견에 부딪혀 물러났다. 이희태는 불탑을 모티프로 신라 기와, 경복궁 근정전 초석 등의 요소를 가미했다. 뒤뜰엔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복제품을 세웠다. 원본의 재료를 면밀히 조사해 경주시 외동읍의 화강석과 울주군 두동면의 응회암질 석영안산암을 사용했다. 조각은 당대 최고 석공으로 꼽혔던 김부관이 맡았다. 6년여에 걸친 공사 끝에 완공된 박물관은 1975년 7월 2일 개관했다. 개관식엔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했다. 다음 달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인왕동 시대의 개막이었다. 1982년 7월 19일엔 제2별관(현 월지관)을 새로 지어 개관했다. 1975년부터 1976년까지 2년에 걸친 안압지(현 동궁과 월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 왕실생활문화를 살펴볼 수 있는 3만30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된데 따른 것이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설계로 지어진 제2별관엔 안압지 출토품을 전시했다. 당시 이름은 ‘안압지관’이었으나, 신라 때 이름인 ‘월지’(月池)란 이름을 되새긴다는 의미에서 전시관의 이름도 ‘월지관’으로 바꿨다. 2002년 5월엔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신라 미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미술관(현 신라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온고각’ 현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지난해 12월 31일 경주문화원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주 전시관에 걸렸던 ‘온고각’ 현판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현판은 조선 총독 데라우치가 1915년 9월 중순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을 방문한 뒤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1975년 인왕동 박물관 개관을 앞두고 유물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박일훈 관장이 탁본 작업을 위해 개인 주거지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오랜 세월 잊혔으나 박 관장의 아들 박기영 선생이 자택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뒤 고 김태중 경주문화원장 재임 시기(2000~2002)에 경주문화원에 맡겨졌다. 경주문화원은 현판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성을 고려해 지금껏 소장해왔으나, 국립경주박물관 측의 수차례에 걸친 반환 요청에 따라 지난해 12월 26일 열린 이사회에서 현판 기증 건을 의결하고 박물관에 현판을 기증했다.  <계속>   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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