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는 찬란한 신라 역사를 품은 고도다. 하지만 경주엔 ‘신라’만 있는 게 아니다. 고려시대엔 영남지역 행정중심인 안동도호부가, 조선시대엔 경상좌도 감영이 설치됐던 도시다. 일제강점기엔 수많은 고대 유적을 기반으로 한반도 최고 관광지라는 명성을 누렸다. 경주읍성과 옛 경주역 인근엔 지금도 근대기의 소박한 풍경이 반짝이고 있다. 신라 천년고도에 남겨진 지난 백년의 흔적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조선시대 경주는 영남의 대표적 도시로 관원의 왕래가 잦았을 뿐 아니라 교통의 요충지였다. 권역도 상당히 넓어 사람들이 많고 물량도 풍부했다. 경상도라는 명칭이 ‘경주’와 ‘상주’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이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경주는 경주부였다. 1415년(태종 15)에 고려 말 명칭인 계림부에서 경주부로 개칭한 이래 19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경주부에는 종2품의 부윤(府尹)이 지방관으로 파견됐다. 조선시대와 현재를 비교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전국에 부윤은 경주부와 전라도의 전주부, 함경도의 영흥부, 평안도의 평양부, 의주부 정도만 있었을 정도로 지금으로 치자면 광역시장급 정도다. 조선시대 경주는 경상도에서 경상도관찰사를 제외하고 종2품의 관품을 가진 지방관이 파견된 유일한 곳이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간주됐다는 의미다.
‘경주읍내전도’가 전하는 경주 관아
조선시대 경주읍성 내 관부(官府, 관청)는 상당히 체계적으로 구성돼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관아 건물이 유기적으로 나눠져 있었고 그 명칭과 위치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를 가장 명료하게 나타낸 지도가 18세기 후반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읍내전도’다.
조선시대 경주읍성을 그린 여러 지도 가운데 관부 건물을 거의 빠짐없이 그려놓은 것은 이 지도가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도를 바탕으로, 경주의 과거기록을 개편 증보한 ‘동경통지’를 통해 당시 경주읍성 내 구조를 파악할 수 있다.
이들 자료에 따르면 경주부의 관아는 오늘날만큼 세분화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부서가 모두 읍성 안에 밀집돼 있다. 객사를 비롯해 행정, 세무, 군무 등을 맡아보는 작은 부서가 담장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읍성 내 대표적인 관청 건물로는 부윤이 직무를 보던 동헌이 대표적이다. 동헌은 관아의 핵심 건물로 많은 관속이 근무하던 곳이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주군청으로 사용됐는데, 군수로 임명돼 동헌의 본채인 일승각(一勝閣)을 마주한 일본인조차도 과분한 느낌이 든다고 할 정도로 그 위용을 자랑했다고 한다. 그 건물은 지금의 대릉원 후문 맞은편 법장사의 대웅전 건물이며 동헌의 정문은 법장사의 중문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 서편으로는 부윤의 살림집인 내아가 있었다.
내아 뒤에는 공방과 토지대장을 소장하고 조세를 부과했던 전결소가 있었고, 서편 길 건너에는 관노방이 있었다. 군관이 머물던 선무별장소는 지금의 경주동산병원 주변이다. 그 뒤쪽 읍성 서문인 망미문 거리의 북쪽엔 죄수를 수용하는 옥과, 무관들이 사무를 보던 양무당이 있었다.
그리고 동경관 동편, 지금의 경주교회 자리에 무학당이, 그 뒤편에는 호적을 발급했던 호적소, 바로 뒤에 관아의 하급 서기가 일을 보던 부사가 자리 잡았다. 이보다 좀 더 뒤편에는 향소청이 있었는데 수령을 자문하고 향리를 규찰하던 민간자치기구로, 동문인 향일문 부근에 있었다.
그러나 경주읍성 안에는 부윤의 직무실인 일승각보다 더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다. 바로 객사인 동경관이었다. 객사를 이렇게 크게 지은 이유는 살아있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하였고 사신(使臣)이나 중앙의 관리 등이 오면 유숙했다.
건물 형태는 삼동(정청·동헌·서헌)일체형이었다. 일제강점기 초등학교로 사용하다가 해방 후 철거하고 서헌만 잘라 경주경찰서 맞은편 자리로 옮겼다.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정조 10년(1786)쯤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옛 원형 간직한 내아·부사·양무당
경주엔 옛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 건물이 남아 있다. 경주시 동부동 경주문화원 내에 있는 향토사료관, 도서실, 수장고가 그것이다. 경주문화원은 옛 내아 건물은 향토사료관으로, 부사는 도서실로, 양무당은 수장고로 각각 활용하고 있다. 이들 건물은 모두 조선 중기~후기 건축물로 2020년 2월 17일 경상북도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됐다.
경상북도는 이들 건물의 지정 사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주부 관아건물인 내아·부사·양무당 등 3동의 건물은 18세기 말에 제작된 ‘경주읍내전도’와 ‘동경통지’에서 실재(實在)했음이 분명히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적어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건축물이다. 비록 부사와 양무당은 이건되었지만 원형을 비교적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내아는 창건된 이래 현재의 위치에서 큰 변모없이 그대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처럼 경주부 관아건물 3채가 모여 있는 이곳은 원래 내아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양무당과 부사는 경주읍성 북문 쪽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부사 건물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을 1칸씩 덧대어 확장한 모습이 특이하다. 옛 내아 건물인 향토사료관에 들어가면 관아건물과 읍성의 역사, 경주의 옛 모습을 담은 흑백사진, 경주읍성 옛 지도와 모형 등을 만나볼 수 있다.
이곳 마당엔 스웨덴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인 구스타브 아돌프 6세가 1926년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뒤 당시 박물관 앞에 기념 식수한 큼직한 전나무가 있다. 그 앞엔 경주에서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다는 산수유나무(300살 추정)도 있다.
이보다 더 오래된 나무는 향토사료관 뒤뜰에 선, 600살 넘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다. 이 나무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 경주부 관아를 지을 때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경상북도 자연유산으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경주문화원 경내를 빠져 나와 인근 KT&G 건물 앞에 섰다. 경주부윤이 업무를 보던 동헌이 있던 자리다. 이곳에서 만난 한 노인이 말했다.
“내 쪼만할 때만 해도 경주경찰서와 등기소 사잇길에 엄청 큰 누각이 있었어요. 어른들이 카데요, 그기 관아로 드는 문인 월성아문이라고” 이 문은 1930년대에 헐렸다.글·사진 김운 역사여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