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 가족들과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왔다. 다섯 식구가 이동하고 먹고 지내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든 것은 당연하지만 영국 여행은 가족 모두에서 분명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확신하여 결정하게 되었다. 영국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나라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많은 제품, 기술, 그리고 방식까지 영국에서 왔다. 먼저 그들의 말인 영어가 이미 세계 공용어다. UN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고 대부분의 국제회의에서도 영어가 통용된다. 그 다음은 지도다. 지구를 동서로 구분하는 경도의 기준인 본초자오선이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를 지나간다. 우리는 영국인이 만든 기준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입는 옷, 양복도 그들의 것이다. 일명 ‘슈트(suit)’ 불리는 정장은 유럽의 각 국가에서 다양한 형태로 입어왔지만, 기본적으로 남색 계열의 상의와 바지, 흰색 셔츠, 갈색의 윙팁 구두를 신는 복식 표준은 영국에서 온 것이다. 여기에 세계대전 참호에서 입었다고 전해지는 ‘트렌치코트’까지 걸치면 모두 영국식으로 차려입은 것이 된다. 이외에도 영국인들에게 그들 나라가 최초인 것을 물어보면 그들은 아마 자랑하듯 최초의 은행, 금융, 축구, 크리켓, 야구 등 엄청난 최초 사례들을 줄줄이 늘여놓을 것이다. 영국은 도시계획에서도 많은 최초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근대적 도시계획 사례인 ‘전원도시(Garden City)’가 ‘에베네저 하워드(Ebenezer Howard)’에 의해 계획되었다. 세계 최초의 공업도시도 ‘맨체스터(Manchester)’이고, ‘존 스노우(John Snow)’ 교수의 콜레라 역학조사로 상하수도의 정비와 같은 도시위생에 대한 인식이 전환된 계기가 마련된 곳도 영국이다. 하지만 영국이 가장 먼저 한 혁신 중 가장 영향력이 높은 것은 바로 산업혁명일 것이다. 제임스 와트가 개발한 증기기관의 덕으로 제조 공정이 자동화되고 제품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영국은 세계 발전의 흐름을 선도하는 국가였다. 필자는 2015년과 16년에 모두 넉 달 정도 영국에 파견근무를 다녀온 적이 있다. 짧은 파견 생활이었지만, 어학연수 한번 다녀온 적 없고 장기간 해외 체류 경험도 없었던 터라 영국에서 경험한 것들이 외국의 상황이라고 일반화하여 받아들였던 것 같다. 당시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영국은 여러 면에서 불편했다. 숙소의 인터넷 속도도 느렸고, 지하철이나 지하공간에서는 인터넷 자체가 연결되지 않았다. 세계 최초로 지하철을 개통한 나라지만, 런던의 ‘튜브’는 낡고 좁았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목조로 된 호텔에서는 최고 꼭대기 층까지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지방 도시를 여행할 때는 종이로 된 승차권을 받았던 기억이 있고, 식당에서는 밥을 먹고 현금으로 결제하고, 동전과 지폐를 팁으로 식탁 위에 올려두곤 했다. 당시 한국에 비해서 많은 부분이 아날로그였고, 한국이 여러 면에서 편하고 빠른 사회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 영국을 다녀오고 나서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코로나로 인해 영국 사회는 비대면 환경에 적합한 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고, 4차산업혁명의 다양한 도시서비스들이 시민들에게 풍부하게 제공되고 있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스마트폰으로 교통 요금이 결제되는 것은 기본이었고, 대형 슈퍼마켓에서는 판매자 없이 구매자가 스스로 RFID 리더기를 이용하여 물건을 결제했다. 식당은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식당에서도 QR코드를 이용하여 메뉴를 검토하고 결제도 스마트폰으로 진행되었다. 우리나라와 더 큰 차이는 공유경제 서비스의 활성화였다. 5명 식구가 묵을 호텔이 마땅치 않았는데 공유숙박플랫폼인 에어비앤비를 이용했다. 런던 시내에는 차량공유서비스에 등록된 차들이 많이 다니고 있었다. 계약을 통해 무거운 짐들을 일반 가게에서 저렴한 가격에 보관해 주는 서비스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공유경제서비스들 대부분이 한국에서는 규제로 도입이 어렵거나 도입되더라도 제한이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한국이 정보통신강국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이제 좀 민망한 상황이 되었다. 양질의 인프라를 보유하고도 규제에 얽매여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는 상황이 안타깝다. 지금 영국의 변신은 대규모 시설을 투자한 것이 아니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소프트웨어의 적극적인 활용에 있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변화는 도시민의 삶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만, 자원을 공유함으로 인해 기후변화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것 또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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