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이 말만큼 한국의 아픈 근현대사를 요약하는 말이 있을까. 쿠데타에 관한 격언 쯤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위 말은 놀랍게도 1997. 4. 17. 대법원의 판결 중 소수의견(1인의 반대의견)으로 설시된 내용이다.
1997. 4. 17.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전두환 등 내란 행위자들을 대상으로 “헌법상 국가기관의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상태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헌법까지 변경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새로운 법질서를 수립한 것으로 볼 수 없고 민주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폭력에 의한 정권장악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는 이유로 유죄취지의 판결을 하였는데, 위 판결의 과정에서 일부 대법관은 아래와 같이 소수의견을 밝혔다.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에 의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이를 토대로 헌법상 통지체제의 권력구조를 변경하고 국회 등 국가기관을 새로 구성하거나 선출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이 국민투표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로서 국회가 새로 구성되는 등 통치권의 담당자가 교체되었다면 이는 군사반란 및 내란행위로서 형식적으로 범죄를 구성한다 할지라도 헌정질서의 변혁을 가져온 ‘고도의 정치행위’라 할 것이고, 그러한 고도의 정치문제는 정치적 통합과정을 통하여 해결되어야 하는 것이고 이미 국민이 이를 장기간 수용해 온 이상 재판부가 재판권을 행사함으로서 그 죄책을 따질 수는 없다.”
위 소수의견은 그야말로 ‘소수의 의견’으로서 판결의 주문에는 반영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마치 쿠데타의 성공여부에 따라 그 당부가 달리 판단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여지를 남기게 되었고, 누군가에게는 위법성 조각(면제)사유로까지 여겨진 듯하다.
그러나 단호히 말하건데 위 소수의견은 틀렸다. 헌법이 보장하고 수호해 온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최선의 결과’를 보장할 수 없더라도 ‘결과를 선택해나가는 과정’을 지켜야한다는 것이며, 민주사회에서 사법부를 비롯한 범법조계는 이를 위협하는 일체의 압제를 배격하여야 하는 것이 그 직무적 소명이다.
“왜 더 저항하지 않았나” “가해행위를 결국 용인한 것이 아니냐” 는 식의 위 소수의견은 쿠데타로 얼룩진 한국근현대사와 법조계에까지 뿌리 깊은 가해자 중심사고를 남겼고, 현재까지 모든 범죄의 유형에서 모든 피해자들에 대한 가해 논리로 적용되고 있다.
얼마나 더 저항하고 무엇을 더 잃었어야 ‘충분한 저항’으로 볼 수 있겠는가.
더불어 위 소수의견은 가해자중심논리 외에도 한국사회에 짙고 긴 그림자를 남겼는데, 그것은 쿠데타의 성공 여부를 화두에 올림으로서 사회가 범죄자의 이익을 중심으로 사고하도록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나 쿠데타 성공 여부는 그 과실을 누릴 이익집단을 개편하는 요소일 뿐 그 당부나 위법을 판단하는 가치잣대와는 논리적·법적으로 무관하며 무관해야한다.
단언컨대 폭력이 동원되는 모든 종류의 쿠데타는 성패와 무관하게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는 모든 종류의 이성과 감성을 마비시키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로, 누군가에게는 무기력으로, 누군가에게는 이익획책의 기회로 새겨지는 바, 모든 종류의 쿠데타는 모든 공동체에 필연적으로 유해하다.
그러한 전제에서 위 소수의견을 다시 평가하자면, 이는 억압된 상황에서 통제된 지성과 마비된 이성이 마침내 아와 타를 구별하는 능력을 상실한채 법치와 법조인의 가치를 스스로 부인하는 취지의 자기소멸적 판단이다.
결국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하에서 쿠데타는 그 성패에 따라 용인 범위가 달라질 수 없는 것이며, 이념에 따른 진영논리와 무관하게 단호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것만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최선의 선택이자 공동체의 존립을 전제로 한 최후의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