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사화(鷄林士禍)는 을사년(1725) 경주부의 영남남인이 화를 당한 사건으로, 1722년 경주부윤 권세항(權世恒.재임1722.4~1723.2)과 울산부사 홍상빈(洪尙賓,1672~1740)이 경주지역 남인 유생 1백여명을 동원하여 노론의 거두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를 모신 봉암영당(鳳巖影堂)을 훼철했다가 대거 치죄(治罪)된 사화를 말한다. 봉암영당은 1717년 우암을 모시는 서원건립 소장(疏章)을 시작으로 1719년 노론계 경주부윤 이정익의 도움으로 건립되었고, 1725년 부윤 조명봉에 힘입어 인산영당(仁山影堂)을 거쳐, 1764년 영당에 목주를 모시고 강당을 증축하고 ‘인산서원’이라 명하였다.
노론계 서원으로 유명했던 인산서원은 현재 허물어지고 흔적조차 알기 어려운 실정으로 당시 남인의 땅에 노론계 서원건립을 둘러싼 경주부의 봉암영당 훼철사건과 계림사화 발발 그리고 남인과 노론의 향전(鄕戰) 대립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의 하나이다.
우암은 1674년 제2차 예송논쟁에서 패해 파직삭출되어, 1675년(숙종1) 정월에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포항의 장기(長鬐)와 경남의 거제로 이배되었다. 당시 우암은 포항 장기에서 5년간 적거하다가 1679년 4월 거제로 이배되는 과정에 경주부를 경유하면서 경주의 곡산한씨 등과 접촉하였다. 이에 둔옹(遁翁) 한여유(韓汝愈,1642~1709)의 󰡔둔옹집󰡕 「연보」에 의하면, “기미년(1679) 선생[한여유] 38세에 유배에 오른 우암 선생을 뵈었다. 이때 송 선생께서는 포항 장기[蓬山]로부터 거제로 이배되어 경주를 지나갔다.”라 기록한다.
이 일로 경주 인왕산자락 아래에 곡산한씨의 주도로 봉암영당을 세우고 훗날 인산서원으로 변모를 거듭하면서 영남의 근거지에 노론계 서원의 입지를 확고히 하지만, 서원건립에 참가한 이들은 대부분 노론인사였으며, 영남남인의 참여는 거의 없었다. 게다가 유림의 공조와 부윤의 도움으로 봉암영당을 지었지만 1722년 남인에 의한 봉암영당 훼철사건이 발생하면서 노론의 한시유가 장살(杖殺)을 당하며 유림 간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기게 된다. 이후 을사년(1725)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지난날 봉암영당 훼철사건이 재조명되면서 당시 남인계 경주부의 이덕표(李德標)와 울산부의 이광희(李光熹) 등 28명을 처벌하는 사건[鷄林士禍]이 벌어지면서, 경주 유림 간 갈등의 대립은 심화되어 간다. 결국 경주부의 남인계 등은 봉암영당의 건립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결국 봉암영당 훼철사건과 을사년(1725) 계림사화라는 경주부윤의 당론과 집권세력의 입장에 따라 남인과 노론의 힘겨루기는 지역 유림 간 큰 진통을 낳았다.
시대별 사화와 정쟁(政爭)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어 왔으며 중앙의 정치세력과 지방의 부윤과 목사 그리고 관찰사 역시 정치적 흐름에 따라 체직되었다. 경주부에 발생한 계림사화는 우암이 포항 장기에서 거제로 이배되어 가는 과정에서 경주부를 경유한 일이 어째보면 덕화(德化)이자 참화(慘禍)로 판단된다. 이는 다분히 중앙정치와 연동되었으며, 지방에서도 중앙의 통제에 따라 영당과 사당건립 등의 소규모 전개양상이 이뤄졌을 것이다. 다만 중앙과 지방의 유착에 대한 단서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남인(서인주도)의 정권장악 이후 1674년 갑인예송에서 남인이 우위에 있었고, 이후 서인에 의한 남인의 정치적 탄압이 지속되었으며, 1680년 경신환국과 1694년 갑술환국으로 집권세력이 교체되었다.
이렇듯 숙종년간 지속된 환국으로 붕당체제에서 일당(一黨) 체제의 정치판도로 변하고, 이에 대한 영향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당시 안동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노론계가 영남의 곳곳에 파고들어 서원을 건립하며 남인들과 공분을 사는 일이 발생하고, 그 가운데 경주지역 역시 영남남인이 노론에 의해 탄압이 일어나면서 그 중심선상에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신임옥사(辛壬獄事)를 맞이해 양동의 우와 이덕표가 「변신옥소」을 올리는 과정에서 이미 노론의 미움을 샀고, 더불어 경주 땅에 노론계 서원이 들어서면서 남인과 노론의 대립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태가 된다.
거제에서 우암의 유상(遺像)을 받으러 온 옥삼헌(玉三獻)에게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은 “공자께서 뗏목을 타고 구이(九夷)에 가고자한 탄식이 있은 것은 또한 우암 선생이 귀양 간 것이 사람의 재액(災厄)으로 간 것이 아니고, 이 역시 시류(時流)가 하여금 그렇게 시킨 것이다”라며 군자가 가서 살고자 한 구이를 빗대어 설명한 것처럼, 우암의 유배 역시 인액(人厄)이 아니라 시류 때문이라 말한다. 시류가 때로는 남인을, 때로는 노론을 곤혹함에 처하게 하였지만, 그 누가 이 일에 대해 시비를 끊듯이 가르겠는가?
계림사화의 처분에 남인과 노론의 잘잘못을 논하기에 역사적 아픔과 유림 간의 이해관계는 더욱 복잡하고, 당시 격하게 대립된 상황을 시류로써 이해하며, 나아가 이제는 화해와 협력자로 동조하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