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도 봄                                     김기택 버스에 앉아 있다 선남선녀비닐 의자 위에 핀 생화들꽃향기가 밀어 올리는 말소리 웃음소리그 싱그러운 봄의 정물 속으로 한 노인이 들어온다노인이 두리번거리자마자 갑자기선남선녀 위에 붙어 있는 노란 스티커 ‘노약자석’아무리 건강해도젊은이 못지않은 기력이 뻗쳐도늙음은 버스 타면 젊은이에게 눈치 주어야 하는 것앉을 자리 찾느라 부산하게 눈치 보아야 하는 것선남선녀 앞에 노인이 바짝 다가선다움직이지 않는 아름다운 정물들스스로 그림 속에서 나올 수 없는 꽃처럼노약자석에 딱 붙어버린그래도 여전히 환하게 빛나는 선남선녀창밖은 시선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착한 봄 날씨핸드폰에는 꽃과 함께 도착한 동영상 메일젊음은 도저히 난처할 겨를이 없다넘쳐 오르는 색과 향기를 어쩌지 못하고피어오르는 일 하나만으로도 너무 바쁘다노약자석에서 일어날 틈이 없다아무리 위엄 있게 헛기침을 해도제 기침에 오히려 제 허리가 구부러지는 노인주름살 속으로 다시 깊숙이 들어가는 장유유서의 눈치갑자기 바짝 쪼그라든 정정함과 당당함은노약자석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데낡은 버스 실내가 은은한 광채로 넘치도록출렁거리는 봄 눈부신 선남선녀 빼앗긴 봄, 반어가 은근히 꼬집는 젊음의 풍속도 김기택의 시에서 갈수록 유머가 넘쳐난다. 그 유머는 사물의 속성을 최대한 살리고 그 내밀함을 드러내는 기능을 하면서도, 그 속에 감추어진 세태를 은근히 끄집어내어 비판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 때 김기택의 시의 유머 속에는 아이러니가 감추어져 있다. 그는 아이러니를 표나게 드러내지 않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병리를 통찰 진단하면서도 시를 윤기있게 살린다. 이 탱탱한 긴장이 그저 그럴 듯이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목격하는 현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그의 시의 매력이다. 우리는 거의 매일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움직인다. 시인은 그중에서도 매일 겪고 보는 버스의 봄 풍경을 가감 없이 묘사한다. 도입부를 보면 영락없이 젊음이 가득한 아름다운 풍경이다. “버스에 앉아 있”는 선남선녀, 그들은 “비닐 의자 위에 핀 생화들”처럼 광휘가 눈부시다. 데이트라도 하듯 연신 말하고 키득이는 모습은 그 자체로 “꽃향기가 밀어 올리는 말소리 웃음소리”가 공기를 다 펄럭이게 한다. 그러나 웬걸, 한 노인이 그 풍경 사이로 들어오자마자 그 생동감은 “봄의 정물(靜物)”이 된다. 그들이 앉은 자리는 마침 “노란 스티커”가 붙은 ‘노약자석’. 그 선남선녀 앞에 마침내 “노인이 바짝 다가”서도 그들은 “시선을 세차게 잡아당기는 착한 봄 날씨”에 눈을 주거나 핸드폰에 “꽃과 함께 도착한 동영상 메일”을 보는 일에 바쁠 뿐이다. 조물주가 ‘봄의 정물(情物)’로 낳아준 그들은 이제 난처할 겨를도 없이, 넘쳐흐르는 색과 향기를 어쩌지 못하고 피어오르는 일 하나만으로 너무 바쁜 젊음이 돼가고 있는 것. 너희들이 앉은 자리가 노약자석이라고 노인은 “아무리 위엄 있게 헛기침을 해도 제 기침에 오히려 제 허리가 구부러”질 뿐. 어디까지 와버렸는가. “늙음은 버스 타면 젊은이에게 눈치 주어야 하는” 세상, “주름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아무 말도 못하는 “장유유서의 눈치”가 된 세상. 시인은 이런 답답한 마음을 블랙 유머를 통해 꼬집으며 우리 시대의 현실을 통찰하고 있는 것. 오늘도 여전히 바짝 쪼그라든 정정함과 당당함이 “노약자석 앞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빼앗긴 버스. 이 버스에 언제 진정한 봄은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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