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산성은 주사산(朱砂山), 오봉산(五峯山) 정상과 이어져 골짜기를 따라 돌을 쌓은 산성으로 주사산성, 부산성 등 명칭을 갖고, 노봉(老峰) 김극기(金克己)에 의하면 부산(富山)은 하지산(下枝山)이라 불리었다. 신라 진평왕, 문무왕을 거쳐 조선시대까지 경주부 서쪽에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선덕여왕이 부산성 서쪽 골짝의 여근곡(女根谷)에 매복한 백제 군사를 소탕한 지기삼사(知幾三事) 이야기는 역사적 에피소드가 된다. 문무왕 3년(663) 1월에 신라가 장창(長倉)을 남산 신성(新城)에 지었으며 경주부 서쪽 32리에 부산성을 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척, 높이가 7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이나 무너졌다. 성 안에 내[川]가 4, 못이 1, 샘이 9개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고 전하는데 무려 샘이 9곳으로 많은 수의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에 효소왕 때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라는 급간(級干)이 모량부(牟梁部)의 익선아간(益宣阿干)에 의해 부산성의 창직(倉直)으로 간 기록이 있다.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패하자 산성과 요해지를 설치하는 계책만을 내세우는 가운데 경주부의 부산성도 거론되며, 김호(金虎) 장군이 임진왜란에 의병의 수장이 되어 부윤의 명으로 부산산성의 경비를 맡았었다. 1597년 3월 26일 도체찰사(都體察使)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경주의 부산성은 적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우니 가령 적군이 지키려한다면 경주 등 곳곳은 반드시 침략의 해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백성과 군병이 급히 성 안으로 들어와 대기하면 적이 쳐들어오는 시기의 빠르고 늦음을 알 수가 없어서 달이 지나고 철이 바뀌면 모두 죽어 없어 질 것이고, 교대로 쳐들어오면 성은 크고 군대는 적어서 막고 수비하기가 어렵습니다”라며 부산성의 주위가 넓고, 군대는 약하여 만약 강제로 지키게 할 경우 궤멸되지 않으면 반드시 함락당할 것이라 보고하며 성을 버릴 것을 보고하였다. 함양출신의 고대(孤臺) 정경운(鄭慶雲,1556~1610)이 쓴 전쟁체험에 대한 『고대일록』에서 “1597년 정월 10일, 영천촌 사람을 만나 부산산성에 대해 들었는데, 산성은 샘물이 극히 적고, 둘레가 매우 넓어서 방어하기 어렵다고 들었다” 그리고 “4월 18일, 왜적 세 명이 거짓으로 우리나라 사람처럼 꾸미고 와서 공산산성(公山山城:대구)의 지형을 엿보고, 또 부산산성에 갔다가 붙잡혔다. 그런데 끝까지 추궁하여 문책하니, 적장(賊將)이 시켜서 산성을 염탐하러 왔다고 한다”기록한다. 이처럼 부산성은 신라의 여러 산성과 더불어 서쪽지방의 침입을 담당하였고, 조선에서도 중요한 요충지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김정호(金正浩,1804~1866)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하지산은 부의 서쪽 32리에 있고, 세속에 ‘부산’이라 부른다. 산의 남쪽에 주암사(朱巖寺)가 있고, 주암사의 북쪽에 대암(臺巖)이 있는데 깎아지른 듯 기이하고 빼어나서 먼 산을 임하고 먼 바다가 바라보인다. 대암의 서쪽에 지맥석(持麥石)이 있는데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고, 그 위는 평탄하여 백여 명이 앉을 만하였다. 지맥석에서 서쪽으로 여덟아홉 걸음을 가면 주암(朱巖)이 있다”라 하였다. 현재 경주시 해설판에 의하면 마당바위(지맥석)은 김유신이 바위에 쌓아둔 보리로 술을 빚어 군사들에게 먹였다고 기록한다. 1611년 간행된 이행(李荇,1478~1534)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오횡묵(吳宖默,1834~1906)의 『여재촬요(輿載撮要)』 그리고 1760년 이후 간행된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도 ‘지맥석’ 동일한 글이 등장한다. 하지만 경주문인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1748~1812)는 1792년 늦가을에 주사산 등을 두루 유람하고 마당바위 지맥석을 ‘타맥(打麥)’으로 기록하였으니, 한자음으로 지맥(持麥)과 타맥(打麥) 등 다양하게 표현된 마당바위라 할 수 있으며, 기록문자의 확인이 필요해 보이는 대목이다. 김극기의 시 서문에 “상상해보면 서발공(舒發公)이 사람들을 시켜 이곳에 보리를 가져다 아침저녁으로 군리(軍吏)에게 음식을 보내어 위로하니, 곰처럼 용감한 장수들이 다투어 힘을 떨치네(想像舒發公 令人此持麥 日夕犒軍吏 熊羆爭奮力)”라며 보리로 음식을 만들어 군리를 위로하였다고 언급한다. 또한 “옛날 신라의 대서발 김유신 공이 이곳에 보리를 가지고 술의 재료로 공급하여 군리들을 대접하던 곳이다”라며 보리로 술을 빚은 일을 말한다. 서발공은 당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한 김유신을 말하며, 문무왕이 김유신을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라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 5백 호를 내린 적이 있다. 아! 고려문인 노봉 김극기의 『김한림집(金翰林集)』, 『김거사집(金居士集)』 등 문집에 신라의 기록물이 많을 것으로 판단하지만, 현재에 전하지 않아 아쉬움이 많고, 자료출처의 진위여부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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