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1일 무직페어라인 황금홀에서 진행되는 신년음악회의 주인공은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빈필이 이들 부자의 왈츠 작품을 연주한다. 오늘날 신년음악회가 오스트리아 최고의 문화관광상품이 된 것은 전적으로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Ⅰ, 1804-1849)는 18세기의 발명품인 왈츠를 음악 장르의 하나로 자리 잡게 한 공이 크다. 왈츠는 당시의 다른 춤과는 달리 남녀가 서로 부둥켜안고 춘다. 이 춤은 19세기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슈트라우스 1세는 동료 란너(Lanner)와 함께 악단을 만들어 승승장구했다. 왈츠는 돈벌이도 좋았다. 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자녀들이 왈츠를 하길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남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Johann StraussⅡ, 1825-1899)는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만다. 그의 나이 19세 때인 1844년, 돔 마이어 카지노에서 악단을 만들어 사교계에 데뷔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성에 도전을 했고, 이후 이들은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1846년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죽은 동료 란너의 후임으로 오스트리아 황실의 궁정무도회 감독에 임명되자 아들이 궁정연주를 못하도록 방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 슈트라우스는 불과 3년 후 성홍열로 사망한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죽기 1년 전에 작곡한 라데츠키 행진곡은 이탈리아를 정복한 오스트리아 장군 라데츠키(Joseph Radetzky von Radetz, 1766-1858)를 찬양하는 곡이다. 오늘날에는 빈필 신년음악회에서 필수적으로 연주되는 신나는 곡이지만, 사실은 황실에 봉사하는 어용작품이었다. 아들 슈트라우스도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왈츠의 아버지’라고 불린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1849년 45세의 나이에 죽자 프랑스의 괴짜 작곡가 베를리오즈는 ‘그가 없는 빈은 도나우 강 없는 오스트리아’라고 하며 애도했다. 부친 사망 후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아버지의 악단과 궁정무도회 감독 자리를 물려받아 빈의 사교계를 석권했다. 1867년에는 라데츠키 행진곡과 더불어 빈필 신년음악회의 필수 레퍼토리가 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An der schönen blauen Donau)’을 초연했다. 이 작품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패배한 조국의 침울한 분위기를 일신하고자 만든 애국적인 곡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 독일과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레타 라이벌이었다. 오페레타의 시조라 불리는 오펜바흐는 ‘호프만 이야기’, ‘지옥의 오르페우스’와 같은 걸작을 남겼다. 이렇게 파리에서 탄생한 오페레타는 빈(Wien)으로 건너가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만나는데, 그는 1874년 오페레타 박쥐(Die Fledermaus)를 초연한다. 이후 20세기에 접어 들어, 레하르(Franz Lehár, 1870-1948)가 더욱 발전시킨 빈의 오페레타는 점차 뮤지컬로 발전하게 된다. 왈츠는 19세기 보수파와 진보파의 격심한 대립에도 불구하고 양 진영 모두에게 사랑받은 장르였다. 브람스든 바그너든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흥겨운 연주에 맞춰 춤을 췄다. ‘왈츠의 왕’은 20세기를 불과 1년 남겨놓고 폐렴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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