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서면 운대리에 있었던 운천향현사(雲泉鄕賢祠)는 임자년(壬子年,1732) 5월에 창건되었고, 찰방(察訪)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1494~1553), 군수(郡守) 귀봉(龜峰) 권덕린(權德麟,1529~1573)을 배향하였다. 당시 경상감사는 조현명(趙顯命), 경주부윤은 김시형(金始炯.재임1730.11~1732.10) 그리고 이헌락(李憲洛,1718~1791)의 부친인 이신중(李愼中)이 일을 주도하였지만, 훗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어찌하여 건천 서면에 제향소가 있었는지 연구가 더 필요하며, 추측하건데 여강이씨의 후손과 안동권씨의 후손 또는 그들의 후학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1684~1747)이 상량문을,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鄰,1658~1737)이 봉안문을 각각 지었다. 김성탁은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고, 조덕린은 권두경(權斗經), 이재(李栽) 등과 교유하였으니 경주의 퇴계학파 계승의 일환으로 인식된다. 권덕린은 회재 이언적의 문인으로 조부 권명추(權命錘), 부친 첨정 권계중(權繼中)의 가계를 갖는다. 1553년(명종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을 거쳐 병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고, 합천군수를 지냈다. 스승 이언적이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죽자, 스승의 영구(靈柩)를 길에서 맞이하여 돌아왔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창의(倡議)하여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세워 제향하였고, 사후에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안동권씨의 시조는 권행(權幸)으로, 원래는 경주 김씨 김행(金行)이였다. 고려 태조를 도와 견훤을 치는 데 큰 공을 세워, 태조로부터 사태의 조짐을 잘 파악하고 권도에 능란하다 하여 권씨 성을 하사받고 대상(大相)에 제수되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은 경주 운천사(雲泉祠)에 태사 권공의 사판(仕版)을 봉안하며 올리는 제문에서 “고려 태조가 이를 가상히 여기며 함께 권도(權道)를 행할 수 있다 말하였네. 봉작과 권씨 성을 하사하니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되었네(麗祖嘉乃 曰可與權 錫封賜姓 爲祖於人||||)”라 하였다. 이언괄은 회재의 동생으로 부친은 이번(李蕃), 모친은 경주손씨 계천군(鷄川君) 손소(孫召)의 따님이다. 1545년 학행으로 추천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1547년 송라도(松蘿道)의 찰방을 지냈다. 사후에 포항 기북면 덕계사(德溪祠)와 덕연별사(德淵別祠)에 제향되었다. 현재 기북 덕동마을에 농재공의 4세손인 사의당(四宜堂) 이강(李疆)의 후손이 사는 집성촌이 자리한다.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에 의하면 “음사(蔭仕)로 주부(主簿)에 이르렀고, 지평에 추증되었다. 회재 선생은 국가의 부름이 많아서 차마 편히 돌아오지 못하고, 공[이언괄]은 부모 곁에 모실 사람이 없어 벼슬에 뜻을 끊고 매일 가까이에서 화락한 모습으로 모시며 선생께서 부모를 잊지 못하는 심정을 위로하였다. … 정미년(1547) 선생께서 멀리 강계로 유배가자, 공은 홀로 모시며 위로하기에 최선을 다하였고, 밤마다 울며 은혜를 베풀어 풀려나기를 기도하였으며, 또 원통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리려 하였으나 선생이 바로 그만두게 하였다. 무신년(1548) 모친상을 당해 공은 나이가 많아 쇠하고 병들었지만, 몸소 염빈(斂殯)하고 시묘 3년을 하였다. 상례를 마치자 수척하고 야위어 쓰러질 것 같았지만 형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리 길을 지나 강계에 이르러 함께 상복을 입고 수개월을 머물렀다. 선생은 피폐하고 파리함을 걱정하여 머물지 말고 돌아가도록 하여 부득이 사직하고 돌아왔다. … 공은 고향에 돌아와 반드시 죽고 살기로 조정에 원통함을 하소연하고자 그 마음을 선생에게 편지로 고하였으나 선생은 또 바로 그만두게 하였다. 공은 이 답답한 마음으로 병이 나날이 더해져 마침내 다음해에 세상을 버렸다”라 하였고, 조덕린의 행장에 이 내용이 들어있다.경주부윤을 지낸 허엽(許曄,1517~1580)은 1574년에 지은「옥산서원기」에서 “합천군수(陜川郡守) 권덕린 공은 회재 이 선생의 학도(學徒:제자)이다. 융경(隆慶) 6년(1572) 9월에 나에게 편지를 보내 ‘선생을 위해 서원을 세웠으니, 그 시말(始末)을 기록해 주고 재사(齋舍)의 명칭도 정해 주십시오’라 하였다. 내가 편지를 받아서 간직해 두고도 병을 앓느라고 즉시 초안을 잡지 못하였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겨울에 선생의 손자인 이준(李浚)이 찾아와서 권(權) 군이 이미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기에 놀라 애도하였다. 젊고 학문에 뜻을 둔 선비가 갑자기 이 지경이 되었으니, 아! 이 무슨 운명이란 말인가. 감회에 젖어 죽은 벗의 부탁을 생각하고는 삼가 졸렬한 글을 엮어서 이 군이 돌아가는 편에 부친다”라며 스승 회재와 제자 권덕린의 관계를 언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