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에게 1907년은 처참한 한 해였다. 장녀인 마리아 안나가 성홍열로 죽는다. 말러 본인도 심장병 진단을 받는다. 말러는 다시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다. 알마와의 사이도 벌어진다. 알마가 4살 연하인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와 바람을 피우자 말러의 불안감은 더해간다. 훗날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에게 심리 상담을 받기도 한다. 설상가상 직장을 잃고 만다. 당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렸는데,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말러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완벽주의를 지향하던 말러는 그의 비타협적 성향 때문에 늘 적이 많았다. 그는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언론의 인신공격성 뭇매를 버텨낼 수 없었다. 결국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 직을 사임하게 된다. 끔찍했던 1907년이 가고, 말러는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1908년). 이탈리아 출신의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에게 밀려 곧 자리를 내주지만, 바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다(1909년). 죽을 때까지 말러는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신세가 되고 만다. 미국을 오가면서도 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말러는 9번 교향곡의 저주를 믿었다. 베토벤을 시작으로 슈베르트, 브루크너, 드보르자크가 자신의 9번 교향곡을 작곡한 뒤 세상을 떠났기에 말러는 이 ‘저주’를 피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9번째 교향곡을 ‘9번 교향곡’이라 하지 않고, ‘대지의 노래’로 대신할 정도였다. 말러의 독선적인 성격과 무관심한 태도에 실망한 알마의 외도는 그쳐지지 않았다. 가뜩이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힘든 나날을 보내던 말러에게 알마의 외도는 죽음의 공포만큼이나 큰 불안을 야기했다. 1910년 연서사건 이후 말러, 알마, 그로피우스의 3자 대면으로 상황은 정리(알마는 그로피우스 대신 말러를 선택했다.)되었지만, 말러는 이듬해(1911년) 심장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만다. 말러는 살아생전에 뛰어난 지휘자로서만 주목받았다. 그가 오프 시즌에 틈틈이 작곡한 ‘탁월한’ 교향곡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사후 반세기가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서다. 말러의 제자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1876-1962)에 이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된 미국인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이 말러를 부활시킨 것이다. 오늘날 말러의 교향곡은 세기말의 정서를 그려낸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작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말러가 예언한 대로 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말러가 죽은 후 알마는 1915년 그로피우스와 재혼했으나 5년 만에 이혼하고, 1929년 유대계 소설가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 1890-1945)과 생애 세 번째이자 마지막 결혼을 한다. 나찌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알마는 베르펠이 죽은 후 첫 번째 남편 말러의 미망인으로 존경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다 죽는다(1965년). 번스타인이 1960년대 미국으로 말러를 소환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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