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봉산 주사암 바로 북쪽에 큰 반석(盤石)이 있는데 지맥석(持麥石)이다. 엄청난 규모의 깎아지른 절벽이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두어 차례 관광차 미국을 찾은 적이 있다. 자연이 우리와 너무 달라 경이로웠는데 그 중 잊지 못할 광경이 그랜드 캐니언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나무나 풀 등을 거의 볼 수 없고 온통 주황색의 벌거벗은 모습, 메마른 지형으로 안쓰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이곳 지맥석은 지형이 그랜드 캐니언과 흡사하면서 수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안심하고 주위를 살펴볼 수 있어 좋았다. 이곳 지맥석을 극락 속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하면 어떨까?『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 등에 지맥석에 관한 기록이 전하고 있는데 두 문헌에서는 모두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시서(詩序)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주사암의 북쪽에 대암(臺岩)이 있어 깎아지른 듯하고, 기이하게 빼어나서 먼 산과 먼 바다를 바라볼 수 있어서 마치 학을 타고 하늘에 올라 온갖 물상(物像)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대석의 서쪽에 지맥석이 있다. 사면이 깎아 세운 듯하여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위는 평탄하여서 백여 명이 족히 앉을 수 있다. 옛날 신라의 대서발(大舒發) 김유신공이 여기에 술 빚을 보리를 두고 술을 빚어 군사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도 말발굽 자국이 남아있다” 보리[麥]로 빚은 술[酒]이라면 맥주(麥酒)가 아니었을까? 신라 사람들이 오늘 우리가 마시는 맥주 양조법으로 술을 빚지는 않았겠지만 보리로 빚은 술이라면 분명 맥주이다. 신라의 명장 김유신이 많은 군사들을 모아 술을 마시면서 놀게 하였다는 위의 기록은 이 지맥석이 부산성 내에 있는 매우 넓은 반석이라는 사실과 관련지어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신라 군사들은 이곳 지맥석에서 술을 마시며 전승(戰勝)의 기쁨을 즐겼거나, 아니면 전쟁에 지친 몸을 쉬면서 다음날의 승리를 서로 다짐했을 것이다. 과음으로 비틀거리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진 군사들은 없었을까? 공연한 걱정을 해 본다. 세종대왕은 바람직한 음주 습관을 ‘적중이지(適中而止)’라고 했다. 적당할 때 그친다는 의미이다. 정조대왕은 화성 축성 당시 기술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회식 자리에 ‘불취무귀(不醉無歸)’라 엄명했다. 이는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로, 실제 취해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다스리는 백성들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면서 술에 흠뻑 취할 수 있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주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당시 김유신 장군은 무슨 생각으로 이곳 지맥석에서 군사들로 하여금 술을 마시게 하였을까? 누군가가 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술은 비와 같다. 옥토에 내리면 꽃을 피우지만 진흙에 내리면 진흙탕을 만든다” 김유신 장군이 군사들에게 마시게 한 술은 옥토에 내린 비였을 것이다. 이곳 지맥석은 인기 드라마였던 ‘선덕여왕’과 ‘동이’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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