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7월 장마철 충청도 오송지역에 집중 호우가 내려 강이 범람하여 큰 인명 손실이 있었다. 사고 발생 전에 지자체 관련기관 여러 곳에 적지 않은 위험 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피해를 키운 측면이 있어 안타깝다. 실종된 사람들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젊은 해병 병사 한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이것도 물에 들어갈 때는 구명조끼를 착용해야 한다는 현장 지침(field manual, 머리글자를 따서 보통 FM이라 칭한다)을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아쉬움이 크다. 이를 간과한 현장 지휘관의 통솔도 아쉽다. 반면, 물이 차고 있는 지하도로 차를 몰고 가다가 U-턴하여 나오면서 자기 만이 아니라 다른 몇 사람의 목숨을 구출한 사람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번 사고는 4대강 사업(금강)은 물론이고 지류에 대한 준설과 정비를 제대로 했다면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물길을 그냥 두는 것이 수질은 물론이고 생태계에도 좋다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수심을 깊게 하여 물을 관리한다고 해서 수질이 나빠지고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강이나 내[川]가 일 년 사시사철 일정하게만 흐른다면 자연 상태로 두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후라는 것은 예측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변동의 폭이 커서 늘 들쭉날쭉 한다. 날이 가물어서 농업 및 생활용수가 모자라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수량(水量)이 너무 많을 때는 통제하기 어려워 이번처럼 큰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기후는 늘 변동의 폭이 크고 예외적 상황이 몇 년에 한 번씩은 닥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다. 물관리는 그러한 상황에 대비하자는 것이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물을 다스리는 것은 국가 경영의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여 농사를 짓고 정주생활을 하면서 통치자들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치수사업이었다. 신라의 예를 들자면, 『삼국사기』에 홍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방을 쌓거나 수리하고 농업 용수 확보를 위해 저수지를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주에는 고래(古來)로 홍수가 자주 발생하였다. 북천(北川)이 문제였는데 수량이 많을 때는 엄청나게 많고 물살이 거세다. 특히, 보문가는 길 오른쪽 숲머리마을 건너편에 있는 금학산 산자락이 북천 가운데로 돌출되어 있어 수량이 많을 때는 물이 여기에 부딪쳐 경주 시내로 들이닥친다. 선사시대 이래 근래까지 홍수가 잦아 경주사람들의 큰 걱정거리였다. 일제강점기 조사와 근래 발굴조사 결과 북천 남안 여러 곳에서 제방으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었다. 신라 때 홍수를 방지하고자 쌓은 제방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홍수기록은 많지 않지만 이에 대비하였다는 것은 『동경잡기』와 ‘알천제방수개기’(閼川堤防修改記,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관련 내용을 보고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경주에 홍수가 자주 발생하였다. 경주세무서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봉덕사(奉德寺)가 홍수에 파괴되면서 그곳에 있던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 종)이 북천 한가운데 묻혀있었다. 또 헌덕왕릉의 상당 부분이 홍수에 파괴되면서 12지신상이 유실되어 일부 복원되었다. 또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서역인 상의 머리는 현재 경주고등학교 교정에 있다. 조선 현종 2년(1661) “경상좌도에 큰물이 져 120가구가 물에 잠기고 70여명이 죽었다. 경주가 특히 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북천에서 발생하는 홍수를 예방하고자 조선시대 4대강 사업과 유사한 작업이 수행되었다. 보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물이 잘 흘러갈 수 있도록 준설작업을 했다. 이 작업을 마치고 난 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금학산 자락 끝 바위 면에 ‘알천제방수개기’를 새겨 두었다.
그 내용 일부를 요약하면 ‘서쪽으로 흘러가는 알천 홍수에 읍 동쪽에 있는 고려시대 나무와 바위로 축조한 제방이 무너졌다. 이 제방이 올해[1707년] 수리되었다. 지형에 의해 형성된 물줄기의 물길이 청소되고 옛 물길에 따라 깊어졌다’고 되어 있다.
과거 경주는 일일 180mm 정도의 집중호우만 내려도 물난리가 났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내린 강수량은 170mm도 안되지만 경주 시내는 적지 않은 홍수 피해를 입었다. 경주 홍수는 1977년 덕동댐이 완공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991년 글래디스 호 태풍이 왔을 때 많은 비가 쏟아져 덕동댐 나팔관이 이를 다 소화하지 못하여 둑 위로 물이 넘쳐나면서 댐이 붕괴될 위기에 처해진 적도 있다. 큰 사고는 없었지만 경주시내 많은 사람들이 고지대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이때 덕동댐이 없었다면 경주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물흐름을 자연에 맡겨 수질을 개선하고 생태계 보전을 위해서 덕동댐과 보문호도 해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