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제(Georges Bizet/1838-1875)의 카르멘(Carmen/1875년 초연)은 사실주의 오페라의 효시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타이틀 롤인 카르멘은 세비야의 한 담배공장에 일하는 집시여인으로 매력적인 외모에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졌다. 이런 팜므파탈 카르멘에게 반해 인생을 망치는 돈 호세는 세비야의 군인이다. 안타깝게도 고향에 미카엘라라는 참한 약혼녀가 있다. 한편, 에스카미요는 투우사로 세비야의 인기스타다. 카르멘, 돈 호세와 함께 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카르멘이 음악사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카르멘이 집시여인이기 때문이다. 당시 집시는 천시 받는 부류였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남성에 비해 처참했다. 주인공이 ‘집시’면서 ‘여인’이었기에, 이런 일반서민에도 못 미치는 ‘집시여인’이 오페라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꽤나 쇼킹한 일이었다. 그래서 초연의 성과는 변변치 못했다. 하지만 빈에서의 공연은 대성공이었는데, 비제는 이를 누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오늘날 유명 오페라극장 치고 카르멘을 레퍼토리를 갖고 있지 않는 극장은 거의 없다. 이는 카르멘이 흥행의 보증수표라는 증표인데,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일단 서곡이 좋다. 오늘날 카르멘 서곡은 따로 떼서 교향악단 연주회에서 애용된다. 다음은 카르멘의 불멸의 아리아 하바네라다. 돈 호세를 유혹하는, 귀에 착착 감기는 멜로디가 매력적이다. 또한 에스카미요의 투우사의 노래는 어떤가? 카르멘에 나오는 음악들은 그 음악들로 따로 연주회를 기획할 정도로 멋지고 아름답다. 보통 오페라의 주인공은 테너와 소프라노 배역이 차지한다. 하지만 카르멘에서는 메조소프라노와 바리톤이 중요 역할을 맡는다. 카르멘은 메조소프라노, 에스카미오는 바리톤이다. 아마 메조소프라노나 바리톤이 맡는 배역 중 최고이지 않나 싶다. 카르멘은 이탈리아의 비극 오페라의 소재를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페라 세리아에서 비극의 주인공은 대체로 영웅이나 귀족 같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카르멘은 담배공장 여공, 하급군인, 투우사 같은 하급계층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비극적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은 1890년대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스카니(Pietro Mascagni/1863-1945)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Cavalleria Rusticana/1890년 초연)나 레온카발로(Ruggero Leoncavallo/1857-1919)의 팔리아치(Pagliacci/1892년 초연)가 대표적인 베리스모 오페라다. 시골 처녀와 총각들, 그리고 광대가 작품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비제는 오페라 본고장인 이탈리아 베리스모의 선구자가 되었다. 카르멘 한편으로 오페라사의 한 획을 긋는 존재감을 뿜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