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렸을 때는 머슴을 둔 집이 더러 있었다. 머슴이 거처하는 방에 동네 젊은이들이 자주 모였다. 그러면 주인집에서는 커다란 보시기에 짠 동치미를 몇 사발을 들여준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잘 삭은 무를 어썩어썩 씹어 삼키고는 국물을 들이킨다. 그러면 소변이 마렵다. 주인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들이 변소에 내갈긴 소변이 바로 거름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약삭빠른 사람은 자기 집에 가서 볼일을 보고 오곤 했다. 가끔은 내기를 하기도 했다. 누군가가 찹쌀 한 되로 만든 떡을 다 먹을 수 있겠냐는 것이다. 내기에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을 걸었다. 어쩌면 쌀 한 가마 쯤 되었을 것이다. 좀 모자라는 사람이 바로 집으로 가서 찹쌀 한 되로 떡을 해서 먹어보니 좀 무리가 되긴 했으나 이를 먹을 수 있었다. 그 길로 돌아와 내기를 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제법 호기를 부리며 먹었으나 결국 다 먹지 못해 내기에 지게 되었다. 질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떡을 다 먹으면 두 되 떡을 먹는 셈이 아닌가? 또 이런 내기를 하기도 했을 것이다. 저 뒷산 공동묘지에 다녀올 수 있냐는 것이다. 공동묘지에는 귀신이 많이 나타난다는 이야기에 모두 겁을 먹곤 했던 시절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청년 하나가 다녀오겠다며 나섰다. 물론 다녀오면 푸짐한 보상이 약속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녀왔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말뚝을 하나 건네며 몇 번째 묘 앞에 이 말뚝을 박고 오라고 했다. 좀 으스스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 묘 앞에 이르러 큰 돌을 하나 집어 말뚝을 박았다. 담력을 과시하려면 깊이 박아야 한다. 곧 귀신이 달려들 것 같지만 꾹 참고 박았다. 다 박고 나서 이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귀신이 옷자락을 잡고 놓아주지를 않는다. 더럭 겁이 나서 큰 소리로 “놓아라!”라고 고함을 치지만 잡은 옷자락을 꽉 쥐고 놓지 않는다.
날이 새도록 이 사람이 돌아오지 않으니 모두 그 묘지로 가 보았다. 먼동이 희끄무레 밝아오는데 그 친구가 묘 앞에서 그때까지 “놓아라, 놓아라!” 외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옷자락이 말뚝과 함께 박혔던 것이었다. 혹 당시에 내기를 했던 사람들이 이곳 모량 사람들이고 그 묘지가 이곳 금척리 고분군이었던 것은 아닐까? 경주에서 국도를 따라 서악과 광명, 모량을 지나 10Km 쯤에 이르면 4번 국도 양편에 작은 산과 같은 고분이 밀집되어 있는데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토총인데, 2기가 맞붙어 있는 표형분도 있다. 모두 경주시내의 대릉원 등에 있는 대형 고분들보다는 규모가 작다.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금척리 고분군이다. 일제강점기의 조사에서는 모두 52기가 확인되었으나 가운데 도로가 생기면서 현재는 32기 정도만 확인되고 있다.
아직 이 고분들에 대하여 본격적인 학술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1952년에 파괴된 고분 2기에서 금귀걸이·곱은옥 등이 출토된 바 있고, 1976년 고분군 사이의 밭에서 작은 규모의 고분들이 발견되어 문화재관리국 경주사적관리사무소가 주관하여 발굴한 바 있다. 이어 1981년 민가 보수 중 파괴된 작은 고분들이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발굴하였다. 당시 세환식 금귀걸이 1쌍, 호박환옥(琥珀丸玉) 1점, 기타 철편·토기편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들은 경주지방의 고분들에서 나오는 것과 같아 축조 시기도 대체로 경주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2013년 5월에는 영남문화재연구원 발굴단이 경주 도심에서 서북쪽 10여㎞ 떨어진 들머리 길목인 동해남부선 철로 연결 예정터 일대를 파보았더니 정연하게 구획된 도로와 네모난 주거지, 우물, 초석 아래에 기초석을 다져 넣은 적심 건물터가 나왔다. 너비 8-5m의 남북-동서축을 잇는 도로도 10군데나 발견됐다. 격자형 도로로 둘러싸인 이 도시 유적은 8세기 것으로, 경주 도심 왕경 유적의 도로·주거지 등과 얼개가 거의 같았다. 신라인의 경주 도시계획이 이곳 외곽까지 확장된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다. 고분군의 남쪽은 모량(牟梁)이다. 그래서 금척리 고분군을 신라의 6부 가운데 하나인 모량부 귀족들의 무덤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량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22대 지증왕의 왕비가 이곳 출신이다. 학계에서는 당시 모량부가 신라 중앙 정계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던 집단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