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송진권 저 노랑을 저 파랑과 하양과 붉음을 지나지 않으면 어스름이 내려오지 않는다지요 거무죽죽한 날개를 떨쳐입은 숭숭 검은 털 배긴 어둠이 오지 않는다지요 나는 등롱에 기름도 채워 두고 심지도 가지런히 잘라두었지만요 기다란 더듬이 소리 없는 날갯짓의 올빼미 같은 어스름이 검은 수레를 타고 곳곳에서 번지듯 스미어 올 때 차마 불을 그을 수 없었음을 뭐라고 해야 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던 사람아 차마 얘기할 수 없어서라며 고개 숙이던 사람아 묵의 농담만으로도 충분히 한세상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온갖 색이 섞인 묵을 명과 암 그 언저리에서 촘촘히 번지는 색 중에 내가 모르는 그 어떤 희미한 빛을 붉은 낙관 찍어 벽에 걸어두렵니다 이처럼 밝은 분간이 너무나 무서워서요 어스름이 그린 한 폭의 수묵화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6월호에 발표된 시인의 ‘수묵’이라는 작품은 한 편의 동양화론 같다. 흔히 채색화가 더 강렬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수묵의 깊이와 멋을 알게 되면 그 말은 달라진다. 채색화가 뿜어내는 아름다움이 화려하고 선명하다면 수묵화는 화면에 번지는 서정성이 그윽하고 서정적이다. 백과 흑 사이, “명과 암 그 언저리에서” 셀 수도 없는 색이 촘촘히 번진다. “번지듯 스미는 수묵” 속에는 그래서 수많은 채색들은 물론 채색화가 표현할 수 없는 그 너머의 색이며 기운까지가 다 들어 있다. 노랑과 파랑, 하양과 붉음을 지나지 않으면 수묵의 “어스름이 내려오지 않는다”는 말도 수묵의 단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수묵은 자신의 세계를 자랑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 나와 이야기하는 그 ‘사람’은 가상적인 청자이기도 하지만, 수묵을 인격화한 표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던 사람아”, “차마 얘기할 수 없어서라며 고개 숙이던 사람아”라고 말하지만 이는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어떤 수묵의 속성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묵의 농담만으로도/충분히 한세상을 담아낼 수 있”다는 말은. 담묵, 중묵, 농묵, 초묵으로 나뉘는 농담의 단계로 수묵은 천의 정조과 만의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그래서 화자는 “숭숭 검은 털 배긴 어둠”, “기다란 더듬이”를 가진 “소리 없는 날갯짓의 올빼미 같은 어스름”이 내려오는 순간의 감흥에 젖어, “등롱에 기름도 채워 두고/심지도 가지런히 잘라두었지만” 쉽게 불을 긋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밝다고 말하는 불빛은 어스름을 다 몰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불이 켜지는 순간은 파랑과 하양 붉음 같은 맑은 이성이 작동하는, “밝은 분간”의 세계이다. 화자는 그 뚜렷한 “분간이 너무나 무서워서” 다만 수묵의 농담이 번질 때 보여주는 “내가 모르는 그 어떤 희미한 빛”을 “붉은 낙관 찍어 벽에 걸어”둘 뿐이다.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어깨를 친다. 정작 이 구절이 이 시의 급소이다. 실은 시인이 화선지가 아니라 어스름의 저녁에 수묵화 한 폭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독자들은 현실의 수묵화가 아니라 시인이 시로 만든, 어스름이 그린 깊고도 그윽한 수묵화 한 폭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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