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대통령은 ‘이권카르텔’에 맞서 자신의 정부가 결연히 싸우겠다고 다짐한다. 심지어 자신의 정부를 ‘반카르텔 정부’라고 불러 달라고 주문한다. 그만큼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강한 열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도 만만찮다. 특히 노동계에서 그렇다. 윤 정부를 ‘막가파 정부’라고 부르며, 윤 정부가 중도퇴진할 ‘새날’이 곧 올 것이라고 선동한다.
어느 외국인이 한국의 봄에는 노란 개나리가,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며 이렇게 꽃도 단조롭게 피는 것이 한국의 특색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말은 꽃에 빗대어 한국의 전반적인 특징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만큼 세계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독특하게, 대단히 단조로운 문화전통의 나라이다. 거기에다 봉건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수천 년간 오로지 중앙집권의 정치문화가 갖는 강력한 구심력에 젖어왔다. 또 인종적으로도 신라의 삼국통일 당시에 인종의 용광로를 거쳐 단일화된 민족 구성원이 그 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런 나라가 지구상에서 희귀하다. 민족의 동일성을 유난히 강조하는 유태인은 그 안에 실은 흑인도 황인종도 있다. 일본이 단일민족이라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랑하였으나 일본인의 생김새는 한국인보다 훨씬 다양하다. 그만큼 여러 인종이 합쳐있는 셈이다.
이렇게 인종적, 문화적으로 동질적인 나라가 갖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한국이 지금 인류 문명사에서 인터넷을 통한 획기적 문명창발의 선도국으로 올라선 것은 위대한 한글과 함께 바로 이 동질성의 사회가 이룩하는 업적이다. 그러나 반면에 사회에 모범이 되는 원칙의 기준이 별로 없고, 나와 동질적 요소를 가진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내가 호의(favor)를 베푸는 ‘연고주의’가 극심하게 창궐하게 되는 단점도 있다.
기왕에 많이 논의된 법조계의 병폐인 ‘전관예우’는 연고주의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최근에 적발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내부에서 아버지가 자식을 직원으로 들인 채용비리나 금전적으로 광범위하게 발생한 부패현상도 바로 연고주의에 의한 것이다. 그런데 선관위의 고위직이건 그렇지 않건 그렇게 뻔뻔스러운 작태를 저질러 놓고서도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거침없이 항변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이 문제가 심각한가 하는 사실을 새삼스레 잘 알 수 있다.
지금 윤 정부가 국정의 애로에 부닥칠 적마다 ‘이권카르텔’이라고 하여 이를 타파하겠다고 한다. 또 주로 이 카르텔과 전임 정부와의 연결성을 강조한다. 상당한 개연성과 진실성이 있으나, 그렇게 하다 보니 반발이 증폭된다.
그런데 이권카르텔을 정의하자면, 동질성의 가진 사람들 사이에 이권을 나누어 갖는다는 말이다. 이 이권카르텔은 사실 사회의 어느 부분에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전반적으로 퍼져있다. 그래서 이것을 우리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에서 파생된 연고주의 창궐 현상의 한 단면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권카르텔은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를 이어 지금 국민들이 목말라 하는 ‘공정의 이념’을 결정적으로 해친다. 하지만 과연 공정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관하여 보면, 마이클 샌델 교수가 ‘공정하다는 착각’이란 저서에서 말했다시피 매우 광범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그 중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에 적용될 최소한의 공정기준을 도출해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국힘당의 이준석 전 당대표 등이 공정의 기준으로 내세우는 ‘실력주의’나 ‘능력주의’와 같은 것은 도저히 현대사회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공정의 하부단계에 위치한 개념이다.
윤 정부가 이권카르텔의 해체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나치게 지엽적으로 문제를 분산시키고 있다. 개별의 이권카르텔을 묶는 일관성이 결여된 점이 거슬린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이권카르텔에 주목하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우리 사회의 고질인 연고주의의 병폐를 고찰하는 것이 옳다. 그리하여 이것을 고쳐나가려면 어떤 기준을 내세워서 해나가야 하는 점을 살펴야 한다. 가령 ‘공정실현위원회’라는 것을 설치하여, 여기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정의 단계와 형태, 우리의 뼛속 깊이 스며든 관념인 연고주의를 타파해나갈 방법 등에 관하여 보다 깊은 논의와 사회적 합의의 도출을 꾀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