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보는 것을 가리기도 한다’
문화재를 찾아다니다 보면 다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잘못 알고 있거나 아는 것도 극히 피상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제 경주의 동쪽을 떠나 서쪽인 건천·서면으로 발길을 돌리고자 한다. 1973년 이전 모량·건천·아화가 모두 서면 소속이었다가 건천이 읍으로 승격하면서 건천읍과 서면으로 행정구역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진한의 한 소국인 사로국을 구성했던 6개의 촌락인 무산대수촌이다. 무산이라는 지명은 무산중·고등학교를 비롯하여 이 지역 곳곳에 남아있다.『삼국유사』에는 ‘촌장인 구례마(俱禮馬)가 하늘에서 이산(伊山)으로 내려와 점량부(漸梁部 또는 漸涿部) 또는 모량부 손씨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라 일컫는데, 박곡촌 등 서촌이 여기에 속했는데 후에 점량부(漸梁部, 일명 牟梁部)로 개편되었다.’고 하였다.
모량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일본인들은 엉뚱하게 ‘毛良’으로 표기하였다. 이후 1998년에 지역민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확실한 고증과 사료를 바탕으로 ‘牟梁’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모량의 한자 표기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문득 피천득의 이름에 관한 일화가 생각난다. 그의 이름은 하늘에서 얻었다는 의미의 ‘天得’이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호적계 직원 실수로 ‘天’이 ‘千’으로 바뀌었다. 이후 이름을 풀이하는 사람이 자신이 부자로 살 것을 이름의 획수가 하나 적어서 가난하게 지낸다고 했단다. ‘毛良’을 ‘牟梁’으로 되돌림으로써 부자는 아니지만 역사성을 되찾은 것이다.『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이사금’조에 의하면 왕 9년 육부 중 대수부를 ‘점량부(모량이라고도 한다)로 고치고 성을 손씨로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제42대 흥덕왕 때의 ‘석종고사(石鍾古事)’의 주인공인 손순을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로 손순이 거주하던 지역이 현곡이라 일부에서는 대수부를 현곡면으로 보기도 하는데, 서촌, 모량부 등의 명칭에서 이 지역이 모량·건천·서면 일대, 그리고 현곡면 등 경주의 서쪽 지역 전체를 대수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삼국유사』 「기이」편에 의하면 신라 제22대 지증왕은 음경의 길이가 한 자 다섯 치가 돼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자를 삼도에 보내서 구해 보도록 하였다. 사자가 모량부 동로수 밑에 이르니 개 두 마리가 북만큼 큰 똥덩어리의 양쪽 끝을 물고 싸우고 있었다. 사자는 그 마을 사람을 찾아 누가 눈 똥인가를 물었다. 이때 한 소녀가 말하였다.
“이것은 모량부 상공(相公)의 딸이 여기서 빨래를 하다가 숲속에 숨어서 눈 것입니다”
이에 그 집을 찾아가 살펴보니 그 여자는 키가 7척 5촌이나 되었다.
이 사실을 왕께 아뢰었더니 왕은 수레를 보내서 그 여자를 궁중으로 맞아들여 황후(皇后)를 봉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축하를 하였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모두 고려척을 사용하였다​. 고려척 1자의 길이는 대략 35.6cm이니 왕의 음경이 무려 50cm가 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황후의 신장은 2m 50cm가 넘었다는데 이를 그대로 믿어야 할지?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당시 당척을 사용했다고 해도 왕의 음경은 45cm, 황후의 키는 2m 25cm에 이른다.
이 기록을 그대로 믿기 어렵지만 왕과 왕비의 체구가 대단했음을 강조하여 표현한 것이리라. 그리고 왕비가 아닌 황후라는 표현이 눈길을 끈다. 화천·방내·송선리 일대에는 국립공원 단석산 지구가 있으며, 단석산(827m) 자락에 위치한 신선사에는 국보인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이 있고, 금척리에는 사적으로 지정된 금척리 고분군, 용명리에는 보물인 경주 용명리 3층 석탑이 있다. 또 모량에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중창한 김대성의 출생 설화가 얽힌 곳이고, 신평리에는 선덕여왕과 관련된 곳인 여근곡이 있다.
서면 주사산에는 신라 때 쌓은 성터와 봉수대 및 주사암이 있다. 또 아화리 석불좌상, 아화리 사지, 고인돌군, 심곡리 석불좌상, 사라리 사지가 있고, 운대리에는 나왕대 터 등이 있다.*지증왕을 『삼국유사』에서는 지철로왕(智哲老王)이라 하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또는 지도로(智度路)이며 시호(諡號)는 지증(智證)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시호를 사용했다고 한다.**이는 지증왕이 권력지향적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모량부에 있는 큰 고목을 지칭하나 모량부의 옛 이름인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의 ‘대수(大樹)’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