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달                                                             박형준 내게도 매달릴 수 있는 나무가 있었으면 좋겠다 아침에는 이슬로 저녁에는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처럼 그러나 때로는 나무가 있어서 빛나고 싶다 석양 속을 날아온 고추잠자리 한 쌍이 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나무에 내려앉듯이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 화로가의 농담(濃淡)으로 식어간다 내게도 그런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 초저녁달, 매달려서 더 빛나는 나무 혹은 사랑 자신의 소망을 “매달릴 수 있는/나무가 있었으면”으로 소박하게 간추리는 도입부터 “그런 뜨겁지만/한적한 저녁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결구에 이르기까지 이미지가 빛난다. 이목구비가 훤칠한 이미지 시편이다. ‘초저녁달’을 하늘에 관습처럼 그냥 떠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모양새를 따라 “매달릴 수 있는 나무”로 전이시키는 이 연금술은 우리 인간이 어디든 ‘매달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여기서 ‘매달리다’라는 말은 ‘주가 되는 것에 딸리어 붙다.’ ‘품에 의지하다’와 같은 맥락이다. 이 시의 주체도 종속이나 상하를 가리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받아주는 대상을 소망하고 있다. 그러기에 자신의 영혼이 아침의 이슬 같거나, 저녁에 제 하고 싶은 대로 “어디 갔다 돌아오는” 바람일지라도 깃들이고 싶은 나무를 찾는 것이다. “고추잠자리 한 쌍이/허공에서 교미를 하다가” 문득 내려앉는 현실의 나무처럼 말이다. 시인은 초저녁달이라는 심미적 대상을 자기 마음의 나무로 가지고자 한다. 그 나무에 매달릴 수 있다면 그 나무로 인하여 그 안에 안긴 존재인 내가 가끔은 더 빛날 때도 있다. 그렇다면 “매달릴 수 있는 나무”는 과연 무엇일까? 인간이 매달린다는 점에서는 한결같이 자신을 받아주고 그이 때문에 자신이 가끔은 주목받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낮의 태양은 너무 뜨겁고, 낮달은 너무 희미하다. 그러나 ‘초저녁달’의 그 사랑은 “뜨겁지만 한적한 저녁”의 편안과 안온으로 자신을 감싸준다. 불같이 뜨거우면서도 그 정념에 타서 매몰되지는 않는, 뜨거우면서도 안달하지 않고 열정과 여유가 적절히 섞인 “불 속에 서 있는 듯하면서도 타지 않는/화로가의 농담(濃淡)”의 자연스런 평정을 가진 사랑이다. 뜨겁지만 타지 않는 사랑, 뜨겁지만 한적한 초저녁달의 거리를 가진 사랑은 이상일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주변엔 그런 연인도, 가족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서로가 뜨겁게 사랑할 자세만 되어 있다면, 서로가 상대를 빛나게 할 마음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매달림도 삶에서의 일이다. 누구에게나 일생 “단 한 번” 나무에 “매달려 사는 생을 잊고/자신의 냄새를 천천히 지”워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그 날이 오기 전 이 세상에서의 삶을 그렇게 사랑하다 가야 한다. 초저녁달’을 “매달릴 수 있는 나무”로 변신시키는 상상력은 신선하다. 이 수일한 이미지로, 시인은 자신만이 가진 시선을 통해 우리 생이 가지는 정서의 가장 소중한 국면, ‘사랑’을 잡아냈다. 서정은 개인이 가진 가장 고유한 감성의 모양새이지만 이렇게 창조적으로 생산되고 공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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