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 일행은 1617년 7월 20일 칠곡의 지암(枝巖)에서 배를 타고 칠곡·하빈·현풍·고령·창녕·영산·함안·칠원을 지나, 7월 24일부터 25일까지 밀양·김해·양산을 거쳐 7월 26일 정오 무렵 동래 온정(溫井)에 도착해 약 한 달을 머물며 동래부사 황여일(黃汝一)과 주변인의 극진한 예우와 함께 온천을 즐겼다.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는 『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에서 스승인 한강 정구가 신병 치료를 위해 제자들과 함께 7월 20일부터 9월 4일까지 동래 온천욕을 다녀오는 과정을 기록하였는데, 온천 후 8월 26일 동래를 떠나 경주를 경유해 지나간 일이 있었다. 한강은 성주 사월리에서 태어났고,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이고, 퇴계 이황․남명 조식․대곡(大谷) 성운(成運,1497~1579)의 문인이다. 향시에 뽑혔으나 회시에 응하지 않았고, 선조년간 1573년에 참봉과 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이후 1586년 함안군수, 1591년 통천군수 등을 역임하며 백성의 칭송이 있었고, 판결사, 승지, 강원도관찰사, 목사 등을 지내고는 병을 핑계로 물러나 ‘모든 바른 행실은 서책에 있으니 실천하라’며 후학양성과 학문정진에 힘썼다. 8월 30일 통도사를 출발해 언양을 지나 저녁에 한강 일행이 경주 전동(錢洞)에 도착하였고 판관 허경(許鏡)이 마중을 나왔다. 이때 경주부윤은 북인출신의 기천(沂川) 윤이영(尹貽永,1563~1619.=尹孝全)이었는데, 송시열과 사상적 맞대결로 유명한 백호(白湖) 윤휴(尹鑴)의 아버지가 된다. 한강은 자신의 평소 병증(病症)에 대해 평생을 갈고 닦았으나 제대로 고쳐지지 않았고, 이로써 사람의 타고난 병통은 변화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말년에 동래를 다녀가면서 경주를 거쳐간 일은 한강 학파의 정립과 결속 및 유대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유람이었다. 특히 포석정에서 만난 43인과 영천 이수에서 만난 51인 등의 기록은 한강과 연관되어 인물의 실명이 거론될 정도로 돈독한 관계이며, 한강학파로 재정립되는 순간이었다. 『봉산욕행록』이 단순한 온천욕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다루었겠지만 경주의 유림들 입장에서는 한강 학풍의 승계작업이라는 또다른 평가도 된다. 이들이 만나서 담론을 나누고 경학을 토론하며 사상을 교유하는 것은 선비의 즐거움 중의 하나였었다. 한강 정구가 동래 온천을 오간 과정 중에 경주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올리면서 부윤 윤효전[윤이영]을 비롯한 등장하는 경주의 인물에도 관심을 가져주시길 앙망하는 바이다.봉산욕행록(蓬山浴行錄) - 석담 이윤우 저녁에 경주 전동(錢洞)에 도착하였는데 판관 허경(許鏡)이 나와서 맞이하였기에 선생께서 매우 미안해하였다. 대구 손처약(孫處約), 경주 한극효(韓克孝), 이종(李琮), 정극후(鄭克後), 김전(金㙉), 김세홍(金世弘)이 와서 뵈었다. 9월 초1일. 선생께서 서둘러 말을 타고 떠나 30리를 갔다. 부윤 윤이영(尹貽永)이 노곡천(奴谷川) 가에 장막을 설치하고 기다렸다. 선생이 다리에 이르러 멈추자 부윤이 나아가 시중을 드는데 다담(茶啖)과 점심을 올렸다. 참례찰방 이의잠(李宜潛), 손우남(孫宇男),정사상(鄭四象),도여유(都汝兪)가 와서 뵈었다. 선생이 수레를 타고 포석정으로 들어가자 부윤이 따라 이르렀다. 유상곡수의 유적은 완연하였고 견훤의 병사가 이미 경계에 닥치고 군신상하가 바야흐로 취해서 노래하며 연회를 즐긴 이 일을 생각하면 어찌 망하지 않았겠는가? 부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서로 잔을 들어 옛일을 회고하였다. 좌우에서 피리불 것을 청하였으나 선생이 만류하였다. 회고록(懷古錄)을 적도록 명하는데 경주부윤 윤이영이 맨 먼저이고, … 김세홍, 노각(盧珏) 43인이 함께 하였다. 선생께서 가마에 올라 부윤이 앞서 인도하도록 하였다. 반월성에 이르자 선생이 가마를 멈추고 두루 전망하였고, 계림을 지나 첨성대를 방문하고 봉황대에 올랐다. 부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피리를 불었다. 어두워질 무렵 민가에 걸린 등불을 본 후에 견여(肩輿)를 타고 산을 내려갔다. 들어가 선도(仙桃觀)에서 묵었는데, 선도관은 관아 안에 있고 부윤이 부모 봉양을 위해 새로 지은 곳으로 이름을 선도라 하였다. 주인 부윤이 선생을 모시는데 극진함이 정성과 공경스러웠고, 친히 제자의 예를 행하였으니, 대단하였다. 초2일. … 부윤이 신라악[羅樂]을 관람을 청하였고 선생이 허락하였다. 황창랑, 처용, 뱃노래 등 놀이가 잠시 펼쳐진 뒤에 선생은 서둘러 떠났다. 부윤과 판관이 따랐고 모량 앞 냇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 해질녘 도천(道川) 정담(鄭湛)의 집에서 묵었다. 초3일. 서악서원장 한극효가 술잔을 올리고 나서 선생이 길을 떠났다. 경주부윤이 쫓아 말 앞에 나아가 고별하였고, 판관 역시 고별하고 돌아갔다. 영천의 이수(二水) 앞 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러 사람이 장막에서 기다렸고, 선생께서 이수동화록(二水同話錄)을 적도록 명하였는데, 정담(鄭湛),박사신(朴士愼) … 조방(曺舫),전여익(田汝翼) 모두 51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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