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이 참 이상하다. 강의 시간에 학생들이 필기도 안 하고 그저 나를 빤히 쳐다만 본다. 당장 내일모레가 시험인데도 그런다. ‘이거 시험에 나오는 대목인데...’ 하는 심정으로 과장된 몸짓으로 강조해 보지만 정작 녀석들은 두 손 놓고 나만 쳐다본다.   나 보기가 역겨울(?) 때는 그들 손에 들린 노트북이나 아이패드를 쳐다본다. 거기엔 미리 올려둔 수업 자료가 열려 있다. 공부를 눈으로 하는 이들이 이상한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다. 동료 교수님들도 강의실마다 그렇다며 이게 다 코로나의 부작용이란다. 2년 이상을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던 게 습관이 돼서 그렇다고. 이상한 점은 우리 아들에게서도 목격된다.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 녀석한테서 자꾸 모기 소리가 나길래 다가가 봤더니, 강의를 1.2배속으로 보고 있었다. “와 이걸 알아듣는다고?”했더니 아들 왈, “이게 편해” 그런다. 어떤 강의는 2배속까지 들어본 적 있다고 으스댄다. 이게 자랑거리인가 싶을 정도로 득의양양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이다.   물론 반사 이익은 있다. 학교에서 치는 영어 듣기 평가가 그렇다. 배속으로 듣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학교에서 들려주는 ‘정상’ 속도의 영어 문장들이 느릿느릿, 또박또박 들린단다. 우리가 파리 같은 날벌레를 맨손으로 잘 못 잡는 이유가 그들 눈에 인간의 행동이 너무 굼뜨게(!) 인식되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파리 눈에 우리가 휘두르는 손은 너무 느려 언제든지 도망갈 수 있다는 말이다. 아인슈타인 말마따나 시간이 상대적으로 인식되니 가능한 이야기다. 어쨌거나 아들아, 세상은 네가 원하듯 1.2배속으로 돌아가질 않는단다. 커피나 짜장면을 주문해도 금방 나오는 게 아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도 찬물이 제법 나온 다음에야 나온단다. 하지만 이 또한 절대적 금구는 아닌가 보다. 요즘 아들 또래가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 중에는 두어 시간짜리 영화를 15분 안에 요점 정리해주는 영상이 차고 넘치고, 학교에서 지정해주는 권장 도서 그 두꺼운 분량을 30분 안에 완전 해체를 해주고 있다. 그마저도 지루하다면 5초나 10초 건너뛰는 기능도 가능하다. 과학 기술은 이제 우리의 인지 속도마저 조절하고 있다. 젊은이들이야 놀라운 속도의 디지털 신세계에 환호하겠지만, 그 속도를 따라가기에 눈도 침침하고 어깨도 굽어가는 성인들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새로운 기술과 계속되는 신제품의 등장이 반갑지가 않다.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소위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 해독)’다. ‘디지털 다이어트(Digital Diet)’나 ‘언플러깅(Unplugging)` 등도 같은 맥락이다. 켜켜이 쌓인 독소를 해독하듯 테크노 스트레스를 줄이자는 움직임이다. 카카오톡 데이터센터에 난 화재로 온 나라가 먹통이 되었던 최근의 경험을 잘 기억하시리라.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카운슬러인 C.브로드가 처음 사용한 테크노 스트레스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 불안형과 의존형인데 스트레스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고객은 나날이 발전하는 기술을 힘들게 따라가느라 스트레스받고, 소프트웨어 기술자는 그 속도를 더 벌이려다 스트레스받는다. 우리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 걸까? 주지하다시피 스트레스는 과도한 외부 자극에 신체가 가진 항상성(homeostasis)이나 일반적인 반응 체계가 엉클어진 상태다. 요즘처럼 개인의 사적인 영역이 디지털 세계에 침범당하는 상황은 더 큰 스트레스를 부른다. 더 이상 개인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통제하지 못하고, 원하든 아니든 외부로부터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야 한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정보 홍수에 노출되고 당연히 스트레스가 끊임없이 발생된다. 테크노 스트레스는 기술(Technology)과 스트레스(Stress)가 합해진 단어다. 왠지 궁합이 안 좋을 것 같지만 오히려 찰떡궁합이다. 감정을 가진 인간이 어떻게 차디찬 소프트웨어와 그럴 수 있냐 하겠지만, 최근 영국에서는 사람이 만진 키보드나 스마트폰에 남아 있는 열을 이용해서 비밀번호를 알아내는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한다.   이 같은 과학 기술의 빅 스텝은 동시에 우리에게 ‘빅 스트레스’이기도 하다. 손에 들린 스마트폰 속 세상이 1.5배나 빨라지더라도 내 걸음걸이는 여전할 테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줄어든다면, 삶의 기준은 나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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