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이라는 약
오은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라면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바지에 커피를 쏟지 않았더라면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지 않았더라면
내가
시인이 되지 않았다면
채우기보다 비우기를 좋아했다면
대화보다 침묵을 좋아했다면
국어사전보다 그림책을 좋아했다면
새벽보다 아침을 좋아했다면
무작정 외출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날 그 시각 거기에 있지 않았다면
너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 말을 끝끝내 꺼내지 않았더라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닦아주는 데 익숙했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보다 앞을 내다보는 데 능숙했다면
만약으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하루하루를 열고 닫지 않았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일어나니 아침이었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불고
읽다 만 책이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만약 내가
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의지대로 펄럭일 수 없는 생에 대한 역설적 긍정
‘인간은 슬퍼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유대인들의 속담이 있다. 참으로 어이없게도 비극은 뒤집어보면 희극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자신이 힘들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인간들은 자신이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이 자신이 과거에 선택한 일의 결과라고 믿는 습성이 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그 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탄식과 후회를 달고 산다.
오은의 이 시는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에 대한 고찰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1연이 늦게 일어나거나, 지하철을 놓치거나, 승강기 문을 급하게 닫은 하루의 서사라면, 2연은 새벽까지 깨어서 글을 쓰는 시인이라는 운명을 선택한 자의 고뇌, 3연은 “그날 그 시각 거기”서 우연히 “너를 마주치”고 “그 말을” 굳이 꺼내 결혼에 이른 자신의 생에 대한 후회다. 각 연마다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우연의 생이 입체적으로 진행된다. 4연에서는 “앞을 내다보는”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일에 익숙한 자신을 괴로워한다. 마침내 5연에서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었다면”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비하한다.
그러나 시인은 모르고 있었을까? ‘만약이라는 약’은 이미 지나버린 일 때문에 생긴 질병을 낫게할 수 있는 묘약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끝 두 연은 앞의 내용에 대한 반전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의 본심은 여기에 있었던 것. 짐짓 “만약 내가/어젯밤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이라고 너스레를 떨고 있지만, 기실 “내 옆에 가만히 엎드려 있”는 “읽다 만 책” 때문에 시를 쓰게 된 시인의 소명의식과 자부심이 넌지시 빛나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