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애기 누가 데리고 있을까                                                         조정 인공 펜 든 사람들 도망칠 때 우리 뒷집 떼보네도 식구대로 산으로 갔어야 음력으로 정월잉께 말도 모다게 추왔것냐 안 그날 밤에 빈집서 애기 우는 소리가 징했니라 그때는 해 지먼 문 밖 걸음을 못 항께 으짤 방법도 없재 징상시럽게 애기는 울고 식구대로 잠을 못 자는디 새복 되서사 잠잠해지등만 ​ 아침 일찌거니 우리 아바님이 시푸라니 얼어서 숨만 붙은 애기를 보듬아다 따순 아랜목에 뉘페농께 금방 얼룩덜룩하니 살이 부커 올르드니 깩 소리도 못 내고 그냥 죽어불드라야 ​ 백일도 안 된 애기 거름배미에 띵게놓고 간 거시여 어매가 들쳐 업은 것을 사나그들이 뺏어 내부렀을 테재 ​ 그란디 진달래 피기 전에 언제언제 밤중에 떼보네 각시가 가만히 왔드락해야 고짱네로 와서 혹간 누가 즈그 애기 데꼬 있능가 묻드라여 -​서로를 다독이며 응원하는 말 - 그러믄요, 그럴밖에요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인 조정 시인의 사집 『그라시재라』를 읽는 밤이다. 자녀들과 함께 소리 내어 읽는데, 웃다가도 자주 울먹인다. 시인은 열 살 무렵 전후에 “동화책을 읽거나 숙제를 하거나 이불 속에 누워서” 때로는 울기도 하면서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고 한다. 전라도 서남지역 방언을 지문 하나 없는 대화체로 이끌어가면서 말맛이 새록새록 살아나는 시들이라서 몇 번이고 읽게 된다. 이 시집에는 말하는 할머니들이 곧 시인이고 주인공이다. 시인은 말하는 자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말을 대신 받아쓸 뿐이다. 시인은 길쌈을 하러 모인 할머니들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적었고, 이야기 조각이 잘 안 이어질 때는 주변 어른들이 대신 말해주었다고 한다. 조정 시인 이전에도 김영랑이나 박목월, 그리고 백석의 시에서 방언을 안 만난 것은 아니지만 아예 방언 자체로만 된 무명옷 차림의 이야기가 농로에 물 흐르듯 흐르고 넘치면서 읽는 이를 빠져들게 하는 시편들은 처음이 아닌가 한다. “그라시재라”는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라는 뜻이다. 1960년대 우리 시골 마을의 할머니들은 둘이 혹은 서넛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남의 처지를,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며 세월을 다독였다. 오늘 읽을 이 시편은 두엄더미에 던져놓고 간(“거름배미에 띵게놓고 간”) 백일도 안 된 애기를 찾아 밤중에 내려온 어미(“떼보네 각시”)의 아픔을 풀어낸 시다. 산에 숨어서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을 어미. “시푸라니 얼어서 숨만 붙”어 있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어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마음을 대신하는 할머니들의 말이 얽혀져 월출산을 흘러내리는 달빛이 되고 이슬이 되고 어둠이 되고, 어떤 말에는 혼이 서려 지나가는 귀신도 발을 멈추고 귀를 귀울이게 한다. 그러나 정작 할머니들은 그 일들을 고발하고 한을 품는 것이 아니라 너그러이 받아들인다. 일이 있을 때마다 모여 아픈 역사의 굴곡을 넘어온 내 이웃의 사연과 사정에 귀 기울이고 오늘을 추렴할 뿐이다. 그래서 옆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온 반응이 “그라시재라”, “그러믄요”, “그럴밖에요”다. “제 탯말의 문화 배경에서 비애란 승화되는 것이 아니고 일상을 다지는 것이었어요”라는 시인의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길쌈을 하는 할머니들의 사운거리는 말맛을 잠결에 듣다가 깨어나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보낸 시인은 행복했을까, 슬펐을까? 확실한 것은 제도교육 밖에 있는 사람들의 조용하고 깊은 통찰과 지혜가 소위 먹물들의 관념과 허위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중하다는 것을 비교적 어린 나이에 깨닫고, 그 말들이 화석화되기 전에 뜰채로 건져내어 파닥이게 한 것은 우리 시사의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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