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쇼팽의 국적을 물어본다면? 쇼팽은 그 이름이 주는 느낌 때문에 프랑스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폴란드 사람이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속인주의 관점에선 프랑스 사람이다. 아버지가 프랑스 인이기 때문이다. 쇼팽의 아버지는 프랑스 혁명(1789) 후 폴란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폴란드 귀족 여성과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쇼팽은 이중에서 둘째이자 외동아들이다. 쇼팽의 귀족스럽고, 여성스런 이미지는 이러한 출생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쇼팽(F.Chopin/1810-1849)은 어릴 적부터 음악천재라 불리었다. 폴란드 최고의 음악학교인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첫사랑을 만난다. 이름은 콘스탄티아, 동갑내기 성악가다. 하지만 짝사랑이었다. 소심한 쇼팽은 고백 대신 그녀를 위한 협주곡을 만든다. 1번과 2번 협주곡(1830)이 바로 짝사랑의 산물이다.
쇼팽의 나라, 폴란드는 1927년부터 쇼팽 콩쿠르라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경연대회를 개최해 왔다. 결선에선 두 가지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여 연주해야 하는데, 그 두 작품이 바로 쇼팽 피아노협주곡 1번과 2번이다. 우승하기 위해서는 쇼팽의 (짝)사랑가를 완벽하게 쳐야하는 셈이다.
쇼팽은 21세(1831)에 고향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미 빈(Wien) 공연에서 슈만으로부터 천재 선언(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나타났다!)을 받은 터지만, 빈은 폴란드인 쇼팽에겐 불편한 곳이었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압제 하에 있었고, 빈을 수도로 하는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우방국이었기 때문이다.
파리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 나가는 도시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방인 쇼팽은 적응에 애를 먹었다. 곧 경제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는 미국에 건너갈 생각도 했다. 이즈음에 쇼팽은 우연히 금융재벌 로스차일드가의 막내 제임스를 소개받는다. 제임스는 자신의 살롱에서 쇼팽이 연주하도록 돕는다. 소규모 살롱연주는 무대공포증이 있는 쇼팽에겐 탁월한 선택이었다. 쇼팽의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연주는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쇼팽은 파리의 유력인사들과 자연스레 교류하게 되었고, 고액레슨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찾게 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나? 쇼팽에게 시련이 닥친다. 스물다섯 나이에 폐결핵 진단(1835)을 받은 것이다. 이듬해(1836) 드레스덴에서 우연히 만난 고향친구의 여동생인 보진스카(M.Wodzinska/1819-1896)와 약혼을 했다가 바로 이별하게 된 이유도 쇼팽의 건강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생은 새옹지마(塞翁之馬)다. 실연의 아픔에 빠져있던 쇼팽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