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는 갓 돌이 지난 둘째 아들이 있다. 태어나 일 년이 지난 요즘 밤중에 젖먹이는 것을 끊기 위해 엄마 품이 아닌 필자인 아빠와 함께 잠을 자고 있다. 아이는 밤중에도 곧잘 깨어 젖을 찾곤 하는데 6개월이 지나고 나서는 밤중 수유를 중단하고 길게 잠을 자야 한다고 한다. 아이가 깊은 잠을 자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우선 자는 방의 온도와 습도가 적정해야 한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부모가 곁에 있음을 느끼게 해줘야 한다. 잠시 눈을 떴을 때, 곁에 아빠나 엄마가 보여야하는 것이다. 말은 하지 못해도 아기의 감각은 주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보름 넘게 아이와 함께 자보니 외부적인 환경만큼이나 아이의 감정이 중요한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하루를 즐겁고 편안하게 보냈는지, 엄마와 아빠 그리고 형에게 사랑받고 하루를 유쾌하게 보냈는지도 중요한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충족되었을 때 아이는 평온하게 잘 수 있는 것 같다.
갓난아이가 잘 자기 위한 환경이 있는 것처럼, 글씨를 쓰기 좋은 때도 있다. 이러한 좋은 때는 글씨를 쓰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중국 당나라 초기 서예 이론가이자 서예가로 활동한 손과정(孫過庭)이 쓴 『서보(書譜)』라는 책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있어서 흥미롭다. 손과정은 글씨 쓰기의 적합한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우선 적합한 때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음이 편안하고 세상일에 한가할 때, 둘째 지인에게 은혜를 입어 보답하고자 할 때, 셋째 날씨가 좋을 때, 넷째 종이와 먹 등 좋은 재료가 있을 때, 마지막으로 뜻하지 않게 영감이 일어날 때이다. 이렇게 좋은 때에는 흔연히 붓을 들게 되어 글씨가 부드러우면서도 아름답다고 한다.
이어 손과정은 글씨 쓰기에 적합하지 않는 때도 기술하였다. 첫째 마음은 급하고 몸은 더딜 때, 둘째 내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꼬일 때, 셋째 날씨가 너무 건조하고 더울 때, 넷째 종이와 먹의 질이 떨어질 때, 다섯째 정신이 피곤하고 손에 힘이 떨어졌을 때이다.
이처럼 손과정은 글씨를 쓸 때 주어진 외부 환경(물리적 조건)과 서예가의 주관적인 마음가짐 두 가지 모두를 중요시하였다. 손과정은 초서에 특히 뛰어났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론(書論)을 체계화했기 때문에 『서보』에서 언급한 내용들은 오늘날까지 필자를 포함한 많은 서예가들에게 참고가 된다.
그런데 그가 말한 글씨 쓰기 좋은 때가 일 년 중 얼마나 될까? 사소한 일 때문에 마음은 편할 때보다 불편할 때가 더 많고, 세상의 번잡한 일들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지만 그럴 형편이 못 된다. 집과 직장에서는 돌발적인 일들이 수시로 일어나 일의 흐름을 깨뜨리고, 친구와의 교유도 생각만큼 쉽지 않다. 날씨 역시 쾌청한 날이 드물며, 서예 재료도 매번 좋은 것만 구해 쓸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일상은 지속되고 글씨를 써야 하는 사람은 글씨를 써야만 한다. 날씨가 안 좋아서, 마음이 편치 않아서 붓을 놓고 있다면 그건 변명일 뿐이다. 글씨 쓰기 좋지 않은 때에도 묵묵히 글씨를 쓰며 견뎌야만 훗날 시간과 노력이 응축된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외부적 환경은 조정할 수 없지만 자신의 마음은 되도록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일상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은 비단 서예뿐 아니라 다른 일에도 해당된다. 얼마 전 태풍 힌남노가 경주를 덮쳤다. 지인이 보낸 금장교 아래 넘실거리는 서천(西川)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경주 시내를 금방이라도 삼켜버릴 것 같은 강물은 공포 그 자체였다. 지인이 운영하는 작은 농장도 큰 피해를 입어 1톤 트럭 7대 분량의 쓰레기가 나왔다고 한다.
천재지변에 의한 최악의 상황에 일상을 다시 시작할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상실감과 우울감이 깊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일상은 지속되어야 한다. 물리적인 복구가 우선이지만 상처 난 마음의 회복도 중요하다. 어려운 시기에 마음을 붙잡고 위기를 극복한다면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