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보급이 보편화 되면서 집집마다 책상용 혹은/그리고 노트북 한두 대씩은 다 가지게 된지 오래다. 초·중·고 및 대학과 대학원 등 학급(學級)의 차이는 있어도 연구 과제나 보고서 혹은 논문을 작성하는데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는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도 해당된다.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컴퓨터 사용은 필수적이다. 근래는 위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작업을 위해 컴퓨터의 4촌으로 볼 수 있는 스마트폰이나 테블릿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을 가지고 문서나 논문 작성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컴퓨터가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궁금한 것이나 모르는 것이 있으면 소위 ‘네선생’(네이버) 혹은 ‘구/유선생’(구글/유튜브)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니가 맞느니 내가 맞느니 서로 우길 필요도 없고 점심이나 돈 내기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컴퓨터가 많은 의문을 해소해 주는 것은 맞지만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각급 학교에서 숙제와 연구과제 혹은 석·박사 논문을 유령작가(ghost writer)처럼 써 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좋다고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내용을 아무 생각없이 이것저것 복사와 짜깁기를 해서 연구과제나 논문을 작성했다면 초·중·고 및 대학까지는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학위 과정에서는 큰코다친다. 표절 시비에 휘말리기 때문이다. 근래 이곳저곳에서 학위 논문을 표절했다고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것도 사실 여부를 떠나서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컴퓨터는 논문을 작성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표절을 찾아내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근래는 학위 논문이나 학술 논문을 제출할 때 유사도(類似度) 검사 결과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되어있다. 표절이 의심되면 그 진위를 밝히기 위해 카피 킬러(copy killer)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기도 한다.
필자가 유학을 가기 전에 석사학위 영문 초록을 작성하면서 컴퓨터의 편리함에 대한 맛을 보았다. 환상적이었다. 유학을 가서 컴퓨터 관련 과목을 수강하고 이를 사용해서 보고서를 작성·제출하기도 했다. 특히 고고학 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해서 기초통계를 이용, 분석과 해석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한 번은 토기를 분석한답시고 관련 자료를 개인용이 아닌 범용(汎用, main frame) 컴퓨터에 입력하고 기초통계량을 정리하고 그래프도 그려보았다. 고고학은 자연과학 분야와는 달리 자료가 아무리 많아도 계산에는 0.2초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컴퓨터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출력물이 산더미처럼 쌓여갔다. 문제는 이 결과물에 대한 고고·인류학적 해석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내가 얻고자 하는 결론을 도출할 수도 없었다. 보고서 제출 마감 시간은 다가오고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그 많은 출력물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넣어 버렸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내가 ‘무엇’을 ‘왜’하고자 하는가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이를 정리했는데 결국 ‘종이와 연필’ 그리고 나의 아이디어에 의해 해답이 나왔다. 이 과정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 컴퓨터가 유용한 것은 맞지만 내가 당면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백행이 불여일각’(百行而 不如一覺)이라! 즉, ‘백번 행하는 것 보다 한 번 깨닫는 것이 낫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그 이후 나의 사고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내 손에 한 번 들어 온 물건은 애지중지 여겨 물건에 따라 최소 10년 최대 30년 이상 쓴다. 자동차, 가방, 지갑, 옷, 구두 등을 마르고 닳도록 쓴다. 목이 늘어난 양말을 신고 테니스를 치는 것을 보고 클럽의 회원들이 놀리지만 상관하지 않는다. 폴더 폰을 쓰다보니 카톡이 안된다고 주위에서 불평이 많았다. 소통이 안 된다고. 그러나 전혀 개의치 않고 있다가 스마트폰을 사용한지 아직 3년이 되지 않았다. 연구실에서 매일 컴퓨터를 사용하여 작업을 하지만 모니터는 냉장고만한 것을 쓰다가 얼마 전에 고장 나서 할 수 없이 평면형으로 교체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석·박사 과정 학생들 혹은 연구자들이 컴퓨터가 없어서 혹은 그 성능이 나쁘거나 용량이 부족해서 논문을 못쓰는 것은 아니다. 과거『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책으로 만들 때는 목판에 한자 한자를 새겨 넣었지만 훌륭한 사서(史書)가 되었다. 결국 ‘종이와 연필’ 그리고 특히 책상머리 앞에서 컴퓨터를 마주하며 죽치고 앉아있을 수 있는 묵직한 ‘엉덩이’가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