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J.L.F.Mendelssohn/1809-1847)은 오늘날로 치면 금수저였다. 할아버지 모제스는 독일의 소크라테스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철학자였고, 아버지 아브라함은 멘델스존 은행의 은행장이었다. 그는 명문가문에서 태어났고,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예술적 재능까지 뛰어났다는 사실이다. 아마 음악사에 등장하는 작곡가들 중에서 가장 행운아일 지도 모른다.(그의 이름 펠릭스는 ‘행운아’란 뜻이다.)
멘델스존은 유대인이다. 출신성분이 일생동안, 심지어는 사후에도 그를 괴롭혔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기독교(카톨릭)로 개종하고, 성(姓)도 카톨릭 성인 바로톨디(Bartholdy)로 바꿨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멘델스존이 활동 본거지를 라이프치히로 옮긴 것도 그곳이 유대인에게 비교적 관대한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는 라이프치히에서 게반트하우스(Gewandhaus) 오케스트라의 지휘자(1835년 부임)로 활약하면서 라이프치히를 유럽 음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딴 라이프치히 음악학교를 설립(1843년)하여 후진을 양성했다. 멘델스존이 라이프치히에서 이룬 최고의 공적은 아마도 성(聖)토마스교회의 음악감독으로 30년간 봉직했던 바흐를 선양한 일일 것이다. 바흐가 1729년 초연했던 마태수난곡을 정확히 100년 만인 1829년(20세)에 재연했다. 당시에는 ‘과거의 음악을 공연한다’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은 바흐를 알긴 하지만, 바흐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진 않았다. 멘델스존은 대중들에게 잊혀진 클래식 스타를 당대에 소환해 ‘바흐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과거의 음악도 현재 공연할 수 있다는 개념이 생겨났다. 멘델스존은 여느 음악가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에서 작품활동을 한 지라 작품성향이 혁신적이진 않다. 즉, 낭만주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의 작품은 보수적이었다. 그에겐 형식을 중시한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고전파를 잇는다는 생각이 강했다. 따라서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한 진보적 음악가인 리스트나 바그너와 대립각을 세웠다. 멘델스존이 요절(1847년/38세)하지 않았다면, 멘델스존과 바그너의 싸움은 굉장히 치열했을 것이다.